대학 시절에 산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선 <화요일의 여자들>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본 게 얼마만일까. 10년? 12년? 출판사에서 <화요일...>을 낸 건
1993년이지만, 내가 구입해 읽은 건 1995년 즈음이었을 거다. 17년만에 심심파적으로
몇 개의 단편을 훑었다. 그 중에 "헛간을 태우다"라는 길지 않은 소설이 한 편
있었는데, 젊은 시절 무심하게 '별 내용이 없군' 하며 지나쳤던 이 소설을
지금 읽고 있자니,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작가가 마치 요약본을 내밀기라도 한 듯,
아주 또렷하게 이해됐다. 아, 이게 이런 내용이었단 말이야? 놀랍군.
그런데 처음 읽었을 때는 도대체 왜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었던 거지?
하루키가 난해한 작가라 할 수도 없는데.
아무튼 그랬다. 한때 하루키에 빠져있던 적이 있어, 그의 책은 예전에는
나오는 즉시 구입해 읽었지만, <렉싱턴의 유령> 이후로는 더이상 사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같은
초기작이 하루키 소설의 정수라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장편보다는 단편이,
일반 산문보다는 여행기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어쩌면 소수의.
나이가 한참 들고 서야, 세월이 훌쩍 지나고서야, 사람에 부대끼고,
속물끼가 이곳저곳 스며들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세계가 있구나.
나는 과연 어린 시절, '읽었다'는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전들을
줄거리만 핥고는 내다버렸을까.
탕 요리란 끓일 때 맛성분이 국물에 녹아나고, 식어지면서 다시
맛이 주 재료에 스며드는 것이라지. 그래서 한번 익혀서 바로 먹기보다는
두어 번 쯤 끓여 너무 뜨겁지 않게, 알맞게 식었을 때 쯤 먹는 게 좋다고.
그래, 17년만에 다시 맛보는 하루키 요리의 감칠맛, 근사하네.
Tag // 헛간을 태우다의 헛간이란!
하루키... 저도 참 열심히 읽다가 어느 순간 손을 떼었는데, 최근 다시 읽곤 합니다.
어릴적에 하루키가 뭐 어렵냐?고 했었는데, 뒤돌아 다시 읽으면 지금은 쉬운건 아니다... 라고
생각이 바뀌더라구요 ㅎㅎㅎㅎ
정말 그는 문체 자체가 맘에 듭니다. 단편이랑 에세이들이 참 맘에 들어요.
그리고 말씀하신 초기 3부작이 역시 최고가 아닌가 싶어요. 그 뒤로의 모든 장편은
그 초기 3부작의 변주들이라고 느껴집니다....
아는 작가 나와서 기분 좋게 수다 떨다 가네요.
저의 닉도 태엽감는 새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 ^^
오!!!! 상실의 시대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한때 필독서였죠...
올해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뭔가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느낌을 갖게 될거 같어요...
아, cinnamon님 닉네임이 거기서 따온 것이었군요. ^^
90년대에 참 열심히 하루키를 읽었는데, 왜 나는 겨우 스무 살을 간신히 넘은 나이에, 그의 상실감과 우수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로서는 그저 하루키의 '포즈'만을 따라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구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 뿐 아니라 무라카미 류 소설도 열심히 읽었더랬죠. 그 아저씨도 <69> 이후로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갈 버린 것 같지만.
네, 저도 과외하는 동생이 가지고 있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하루키에 입문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후후, 그때는 아직 군데도 가기 전이었는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고등학생 때 읽었는데, 그게 내용이 아주 자극적이면서도 표현은 섬세하고 미묘하잖아요. 제목도 그렇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구나' 이러면서 열심히 탐독하던 생각이 나네요.
옛 책들을 다시 읽는 일, 네, 재미있어요.
"화요일의 여자들" 빨간책... 기억이 나요. 좋아하는 책인데, 어디 뒀는지 ;;;
이 포스트 보고 다시 하루키 초기작 읽고싶어졌어요. 읽은 걸 다시 읽고 몇 년 후 또 읽어도 좋은 게 하루키 작품들이죠. "먼 북소리" 같은 건 읽을 때마다 새로워요.
예전에 읽었을 땐, <화요일의 여자들>이 하루키의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밋밋한 것들을 모아둔 작품이라고, 그래서 작은 출판사에서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어요. 다시 읽어보니, 깊이 있는 이야기를 돌려서 혹은 알레고리 형식으로 담아낸 소설들이 가장 많은 소설집인 듯 해요. 그야말로 두 번 읽을 때 더욱 좋은 소설선이랄까요.
<먼 북소리>가, 저는 하루키 여행기 중에서는 단연 최고, 라고 생각한답니다. 그 책은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고, 두 번 읽었을 때도 그랬으며, 다섯 번 읽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죠. 맨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땐,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잠이 안 올 정도였어요. 그 생생한 현실감이란, 단연 제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