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에 해당되는 글 18건
- 제주에서 열리는 몽당연필 소풍 콘서트! 2012/01/30
- 오해 (4) 2012/01/29
- 귤 2012/01/26
- 17년만에 (6) 2012/01/24
- 오래된 새 책 2012/01/21
일본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민족학교와 강정마을 평화기금 마련을 위한
특별한 콘서트가 제주에서 열립니다.
공연은 2월 14일 19시 30분, 장소는 제주아트센터에요.
흠흠, 저도 시간만 된다면 가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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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도 10년 넘게 만나는 친구가 있던가 생각해 보았더니 신기하게도 꽤 있었다. 이젠 더이상 후배라고
할 수 없는 20년 지기 K, 대학에서 만나 지금까지 쭉 손을 놓지 않고 있었던 J와 K, 회사 동료로 만나서
이직한 뒤에도 변함없이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J, 선배이면서 후원자처럼 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는
대학선배 K, 엠파스 블로그 시절부터 친구이자 형인 L, 또 다른 친구인 P.... 막상 세어보니
그 숫자가 적지 않다. 거기다 10년은 채우지 못했지만, K그룹사 시절 직장동료였다가 어느덧 친구가 된 H,
전주와 서울, 다시 전주를 오가는 동안 늘 따뜻한 동료였던 후배 P, 지금도 밤 새는 줄 모르고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는 NAL 식구들까지 꼽자면 내가, 심심해질 때는 있었어도, 외로웠던 때는 참 드물었구나 생각된다.
지금도 상당부분, 나는 그들의 호의에 기대, 사회 생활의 미숙함을 그럭저럭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인복(人福)은 여전히 내 가장 큰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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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오랫동안 만났지만, 그 만남이 아주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가벼운 안부 정도에 그친 채 애매한 이름으로
남아버린 사람들도 몇 있다. 그것도 살펴보자면, 거의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 그쪽에서 청한 모임에 나가
술 몇 잔 얻어먹고 돌아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한편 신기하기도 하다. 의례적인 인간관계에는 야멸차고
때로는 그런 일이 귀찮아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하는 내가,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를 몇 년이나 지속하게 되었을까.
속내를 나눈 것도 아니고, 의견을 다투지도 않으며, 내 쪽에서는 전화 걸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이 묘한 관계를.
한 번 쯤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왜 굳이 만나자는거야? 이런 만남이 너는 정말 소중하니?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을까? 몇 년에 한 번 씩, 명목뿐인 관계를 대청소하듯이 꾸준히 '청산'해온 나에게도 여지껏
남아있는 미적지근한 관계들은 미스터리다. 아니, 이제 다시 한 번 털어낼 때가 된 것일지. 함께 만나온
시간이 관계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가장 큰 기준은 아니다. 횟수나 빈도와는 상관없이, 오직 교류의 '온도'만이
유일한 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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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에서, 허례에서 진심을 구하지 말자. 그건 이미 부도난 계좌이므로. 예금이든 적금이든 넣어둔 게 있어야
만기에 찾을 수 있는 거다. 나는 주식도, 도박도 안 하는 고지식한 인간. 우정에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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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더 이상 이용하지 않는 통장, 어떤 이유로든 사용하지 않게 된 계좌를 다시 살리는 일도 없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간 일일 뿐. 후회라는 낱말에 나만큼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내 모든 과거는 그저 대과거, 과거완료일뿐. 내 관계는 모두 현재형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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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능성을 가둘 필요는 없는 거라고, 누군가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세계관의 차이에요.
나는 과거에서 미래를 찾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과거란, 오직 현재와 연결되어 있는 과거, 내가 붙잡고 있는
관계인 것이니까. 나는 앨범 따위를 간직하는 사람이 아닌걸요. 현존이야말로 내 현재이며 미래, 그리고
과거인 것이죠. 나는 추억보다는 기억, 골방에서 혼자 떠올리는 온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즉물성을 선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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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는 사실 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만, 걔중 어떤 이들은 나와 '끊어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여기서 찾으려는 것은, 사실 더이상 나와는 상관없어진 것들이지요. 하지만 이곳은 내 현재가, 그러니까
그들과는 무관해진 내 삶만이 있는 자리에요. 당신들의 행복을 내게서 찾지 말고 스스로 찾으시길 바래요.
방문은 그저 습관일 뿐, 애착도 그리움도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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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내 삶에 몰두할 시간.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삶이 계속 변태하는 것, 거듭해서 허물을 벗고
스스로 보기에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것뿐. 시간만 있고 기회가 없거나, 기회가 있고 시간이 없거나
기회와 시간이 모두 결핍된 그런 불운에서 자유롭다면, 이제 부딪혀 볼 때이겠지. 생각과 마음은 늘
'거기'에 닿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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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재편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 어쩌면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큰 쾌락.
겨울날,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면서 사부작 사부작 귤 껍질 벗겨
달콤새콤한 감홍색 속살 쪼개먹는 맛은 정말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그만인데,
생협에서 지난주로 올해 계약된 귤 전량이 모두 소비되었다며 '품절'을 알려왔다.
아, 이젠 무농약 귤을 어디서 주문해 먹지.
좀 먼 데 매장이 있는 한살림에 새로 가입해야 하나, 가격이 맘에 안 드는 초록마을에 의지해야 하나.
겨울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쩝.
대학 시절에 산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선 <화요일의 여자들>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본 게 얼마만일까. 10년? 12년? 출판사에서 <화요일...>을 낸 건
1993년이지만, 내가 구입해 읽은 건 1995년 즈음이었을 거다. 17년만에 심심파적으로
몇 개의 단편을 훑었다. 그 중에 "헛간을 태우다"라는 길지 않은 소설이 한 편
있었는데, 젊은 시절 무심하게 '별 내용이 없군' 하며 지나쳤던 이 소설을
지금 읽고 있자니,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작가가 마치 요약본을 내밀기라도 한 듯,
아주 또렷하게 이해됐다. 아, 이게 이런 내용이었단 말이야? 놀랍군.
그런데 처음 읽었을 때는 도대체 왜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었던 거지?
하루키가 난해한 작가라 할 수도 없는데.
아무튼 그랬다. 한때 하루키에 빠져있던 적이 있어, 그의 책은 예전에는
나오는 즉시 구입해 읽었지만, <렉싱턴의 유령> 이후로는 더이상 사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같은
초기작이 하루키 소설의 정수라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장편보다는 단편이,
일반 산문보다는 여행기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어쩌면 소수의.
나이가 한참 들고 서야, 세월이 훌쩍 지나고서야, 사람에 부대끼고,
속물끼가 이곳저곳 스며들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세계가 있구나.
나는 과연 어린 시절, '읽었다'는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전들을
줄거리만 핥고는 내다버렸을까.
탕 요리란 끓일 때 맛성분이 국물에 녹아나고, 식어지면서 다시
맛이 주 재료에 스며드는 것이라지. 그래서 한번 익혀서 바로 먹기보다는
두어 번 쯤 끓여 너무 뜨겁지 않게, 알맞게 식었을 때 쯤 먹는 게 좋다고.
그래, 17년만에 다시 맛보는 하루키 요리의 감칠맛, 근사하네.
Tag // 헛간을 태우다의 헛간이란!
연휴를 앞둔 도서관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관내를 시끌한 장바닥으로 만들던 노인들도 온데간데 없었고
취업책을 숨겨들어와 몰래 밑줄을 긋던 20대들도 자취를 감췄다. 조용하고 여유로와 쾌적하기까지 한
도서관은 정말 오래간만인 거다. 프로젝트 관련 도서들을 먼저 읽느라 잠시 제쳐두었던 '1월의 책'들을
이어 읽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녹색평론선집 2>를
꺼내 읽었다. 서문 페이지를 처음 편 순간, 나는 잠시 동작을 멈추곤 쓰게 웃고 말았다. 그 책이, 놀랍게도,
누군가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새 책이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은, 때로는 악전고투다. 이용자가 많은 도서관일수록 책의 상태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저번에 D도서관에서 읽은 <육식의 종말>은 거의 폐품 수준이었고, <D에게 보낸 편지>는 대출자가 함부로
그어둔 밑줄로 독서의 흐름을 방해받을 정도였다. 신간을 읽지 않는 이상, 고전을 읽으려 들면 들수록,
표지는 물론 속장까지 인내를 각오해야 한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찾는 이가 많은 만화나 소설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고 한다. 그런 책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는 찰나, 출간된 지 3년된 책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새 책이었다는 건 충격이었다. 잡지 <녹색평론>의 가장 좋은 글만을 골라낸 선집이, 그것도 1권이 아니라
1권의 호응으로 시리즈가 된 2권이 단 한 명의 손도 타지 않고 완전한 새 책으로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참담했다. 이것이 도서관의 현실일지도 모르지. 생태와 운동의 근간을 말하는 책들은, 유명한 외국저자의
책도 아니고, 트렌드와도 무관한 우직하고 고집스런 책들은 자극적인 장정과 현란한 띠지, 명사의 추천사로
단단히 무장한 여타 도서들의 경쟁 가운데서 어느새 낡고 촌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녹색평론선집 2>를 도서관에서 새 책으로 읽는 경험은 생경했다. 책을 읽기 쉽게 길을 내고, 손때를 묻혀 가며
천규석과 정경식의 글을 읽었다. 1권과는 달리 2권은 국내 저자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었고, 그 저자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기에 읽는 내내 감정의 진폭이 전보다 훨씬 출렁거렸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2권은 1권의 진정성에다 시의성의 단추까지 채워냈다고 느꼈다. 독후감은 신랄하기도 했고,
혹독하기도 했다. 나는 자연스레 3권을, 아니 녹색평론선집이 나오는 한 계속 읽게 되겠지. 다만 그 독서는
조금 외롭겠구나 싶었다. 이 책 밖의 조건에 대한 감상이, 책 안의 내용에 대한 감상을 압도하고 있는 왜곡된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할 테다.
독서란 원래 아주 개인적인 행위, 사적인 쾌락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까, 책읽기는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책읽기의 고독이 독자의 고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고독한 책읽기를 거쳐, 사람은 더 넓게 바라보고
더 깊게 생각한다. 그 전망과 사유는 현실의 격량과 논의의 공명 속에서 동료와 길을 만들고, 구속과 인습을
넘어 자유와 힘을 창출한다. '모든 것은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 '한 방울의 물'을
'한 사람의 생각'으로 바꿔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책읽기는 그저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만
그 도구가 제 안으로만 어둡게 파들어가는 외골의 곡갱이는 아니다. 그런 깨달음을 주는 책 중의 하나가,
탁월한 조류가 이 땅에서는 바로 녹색평론의 책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울림이 아직 충분히 퍼지지 않은 것뿐.
<녹색평론선집 2>가 3년째 새 책이라는 건 읽는 이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팔리는 책의 절반은 (학교)참고서이며, 나머지 절반 중 다시 절반은 소설책이다. 그 절반 중 10%는
처세 책이며, 또 10%는 레시피, 가이드 등의 실용 책들이다. 우리들은 어쩌다 이렇게나 책을 편식하게 된 걸까.
꼭 '녹색평론'이 아니더라도, 세계를 바꾸자는 책들은 그 안에 곡진한 드라마를 품고 있으며, 살아갈 방법을
제시해 준다. 또 우리 생을 통털어 가장 실용적인 매뉴얼이 되어주기도 한다. 책읽기는 단지 참혹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정신 승리법' 중 하나인가? 출퇴근 시간 신문이나 TV를 대체하는 1회용품일까? 흥분이
과한 것 같다. '오래된 새 책' 한 권을 우연히 만나보고는, 내가 일없이 세상을 질타하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되는 것을, 한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것을, 우리가 바로 그 하나가
되면 되는 것을.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나도 늦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