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전주로 내려갈 때면 맨 먼저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휴대폰의 날씨 위젯(widget)의 기준 지역을
전주에 맞추는 일이다. 대개는 견훤성지가 있는 교동에 때로는 모악산이 자리한 중인동에.
대개 전주는 서울보다 기온이 2도 정도 높고,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바람도 덜 부는 편이다.
여름에는 더위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 열섬 현상으로 아주 뜨겁지만 그밖의 계절은 서울과 비교하면
상당히 포근하다 할 수 있다.
일전에 영화제 집행위에서 일했을 때에는, 동국대 부근의 서울사무소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전주에는 팀장 회의차 1달에 1~2번 내려가는 정도였다. 단, 영화제가 시작되는 4월에는
모든 스텝이 전주에서 근무해야 하므로 4월 초순부터 한달 반 가량을 전주에서 기숙했다.
집행위에서 얻어준 방에서 잠만 자고, 영화제가 폐막할 때까지 줄기차게 야근을 거듭하는 것이
매해 4월의 일과다. 가끔 전주에 내려가는 일과는 다르게, 개막일을 카운트다운 하면서
한달 반을 잠자는 시간 빼고 사무실에서 일하노라면 진이 빠지기 일수였다.
영화의 거리 부근 가맥집이나 삼천동, 서신동 막걸리촌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 외엔
따로 낙이 없었다.
전주에 마음을 사로잡혔던 것은, 몇 년 전 서울국제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게스트로 초청받아
전주영화제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다. 전주가 틀어주는 영화도 하나같이 훌륭했고,
저녁이면 게스트들을 모아 풍성하게 차려주는 밤의 파티도 근사했다.
무엇보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스탭들이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성적이었던데다
영화제와 상관없는 식당들에서 보여주는 푸근한 친절이 특별했다.
아침이면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뜨끈한 콩나물국밥, 5천원(지금은 6천원)에 테이블이 가득차도록
40여가지 반찬을 깔아주는 백반집도 감동적이었다. 전주에 사는 후배 하나와 깊이 인연을 맺게 되면서
영화제가 끝나고도 줄기차게 전주를 놀러다녔다. 서울에서 우울해지면, 그냥 터미널로 가서는
고속버스를 집어타고 전주 영화의 거리를 한 바퀴 돈 다음, 후배와 가맥 몇 잔을 나눠마신 후
밤기차로 서울로 올라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종로에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금요일, 불현듯 병이 도져
버스편으로 전주로 내려왔더니 전주는 아직 따뜻하여 기분좋게 밤 산책을 즐겼던 날도 있었다.
그때, 내가 전주에 가졌던 인상은 따스함이었을 것이다. 전주에게도, 전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러다 인연이 닿아 전주영화제 집행위에서 일하게 됐다. 지방 특유의 텃새가 있어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아
무척 고생했던 초반이 생각난다. 그래도 전주는, 전주 사람들의 품은 변함없이 푸근했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준 후배 P, 적응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했을 때
술자리에서 고민을 토로하자 그 자리에서 형님으로 삼아주면서 끝까지 예의와 대접에서 극진했던 K,
늘 온화한 얼굴로 속내를 들어주었던 S, 본인이 가장 힘들면서도 항상 나를 먼저 도와주려고 했던 K,
내가 일하고 싶다고 하자, 면접조차 보지 않고 합격통보를 해주고는 후방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H형까지....
전주영화제 집행위에서 근무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전주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맡은 건 영화제 일, 어쩌다 다른 곳에서 청탁이 오곤 해도 전주에서 영화제 주관 업무 말고
원고작성을 본업으로 할 수는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우연히 전주와 영화제의 배려로 전주에 관해 끄적일 수 있게 됐다. 영화제 일과 원고 작성
두 가지가 모두 제안이 왔지만, 나는 원고 일을 선택했다. 그게 영화제 근무에 비해 여러모로
불리한 부분이 있어도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오래된 욕망이고, 현실을 꿈과 중첩하는 일이니까.
한계를 절감해야 하지만 그걸 무릅쓰는 만큼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이니까.
여전히 내 주소는 전주에 있다. 그렇지만 기존에 하고 있던 일이 있어 서울과 전주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신세가 됐다. 한달의 반은 전주, 나머지 반은 서울. 워킹화와 등산복을 입고, 등산배낭에는
물통과 노트북, 세면도구를 챙겨서는 전주의 이곳저곳을 밟는다. 서울에서도 도서관을 찾아
전주를 읽어 정리해두고, 인터넷으로 지역 신문과 잡지, 전주 정보를 갈무리한다. 늘 전주 지도를 펴서
내가 걸었던 곳, 행여 빠뜨렸던 곳을 체크한다. 나는 3년 전, <제주 풍경화>를 냈을 때와 같은 자세로
전주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변했고 세월도 흘러, 원고는 제주의 그것과는 색깔이 많이 다르다.
새로운 글을 쓰는 건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이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한 꼭지 한 꼭지
풀어나가고 있다. 마감을 앞두고는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해 하지만,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중이다.
마침내 전주가 내 몸에, 머리에, 손에 그리고 내 문장에 붙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주에 내려가면서 휴대폰의 위젯을 바꾸는 일은 하나의 다짐같은 것이 된다. 마음과 몸을 다해
이 일에 임하겠다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조금 더 나아지겠다는 각오.
그 위젯을 교동이나 중인동에 맞추면서 나는 몸의 부품을 갈아끼운다고 생각하고 있다.
잡지의 청탁으로 짧은 한 꼭지만 쓰는 일이 아니라 전주를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다시 그리고
현재를 과거와 미래와 아울러 중첩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결국 나는 전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허락받았다고 믿는다. 내 세계관과 개성을 바탕으로
전주를 새로이 조각하는 일, 그것은 말 그대로 내 세계를 만드는 일이며, 속깊이 나를 긍정하는 일이라고.
위젯(widget)의 본래 말뜻은 '부품'이다. 나는 이 연재를 위해 종아리 근육과 폐활량, 우뇌와 손목을 갈아끼웠다.
앞으로는 귀와 입, 허벅지 근육과 눈도 바꿔끼우게 되리라. 글로 세우는 전주의 재건축은 사실
내 자신의 재건축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일단 원고의 완성도로 판가름날 테지만 그 너머, 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 것인가가 더 궁금하다.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은 모험이지만 꼭 그만큼
신선하고 생기발랄해 질 것이다. 지난 몇 달 간, 본격적으로 전주를 누비면서 나는 이제 전주 길의 절반을
지도가 아니라 내 몸에 새겼다. 이제는 더이상 영화의 거리와 한옥마을만이 '내 전주'가 아니다. 곳곳의 산과
사찰과 산성, 시장과 건물, 사람들과 풍경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내 전주는 바야흐로 크게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원고가 원고로 끝날 지, 그 뒤에 새로운 몸을 얻게 될 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변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추동하고 싶었던가, 내적으로 안되면 외적 강압으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인연이 닿았고 길이 펼쳐졌다. 성장이란 자신을 바꾸는 일, 머물지 않고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교체하는 작업.
고백하건대, 나는 전주를 사랑한다. 이 연애는 막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