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간서치의 삶'에 해당되는 글 71건

  1. 겹눈 2012/05/15
  2. 중요한 게 없다면 2012/04/24
  3. 김연수의 "원더 보이" 2012/03/26
  4. 차이 2012/03/19
  5. 종속변수 2012/02/29

겹눈

from 책읽기, 간서치의 삶 2012/05/15 20:30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 詩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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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형도 전집을 읽었다. 문지사의 <입 속의 검은 잎>과 살림의 <짧은 여행의 기록>에다
솔이 발간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몇 편의 습작시, 일기, 메모들이 곁들어진 책이다.
그러니까, 이 전집은 그의 모든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걸 읽다가 아무래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더 좋았던 것 같아 함께 펼쳐놓고 번갈아 살폈더니 전집에는 없고 <사랑을 잃고...>에만 있는
그의 친구들의 발문이 아주 탁월해서 그렇게 느꼈다는 걸 알게 됐다.
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소설가 성석제가 쓴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과
생전에 그가 아끼는 후배였던 시인 장정일(이때는 장정일이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다)이 쓴
"기억할만한 질주, 혹은 용기"가 특히 훌륭했다.

장정일의 글을 읽고서 펼쳐보는 기형도의 시 '기억할만한 지나침'은 확실히 다시 읽힌다.
결국 기형도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멈추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그 울음을 외면하고
비정해지지도 못했다. 그 안간힘의 자리가 기형도의 자리다. 겹눈으로 자아와 현실을 인정하고
수락하면서도 끝내 거기 익숙해지지 못했던 근대적 인간의 그늘이 시들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기형도는 우리 시대의 윤동주가 아니었을까. 산업화 시대의 윤동주, 도시 속의 윤동주 말이다.

나도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끝내 거기 머무를 수 밖에 없었는가를
가만히 되묻고 싶을 뿐이다. 그 너머의 자리가 근대 이후, 비로소 '다음'일 것 같구나.





2012/05/15 20:30 2012/05/15 20:30

채식주의의 장점은 무엇인지, 자신이 왜 채색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책들은 많다.  
그러나 채식주의의 이념, 그러니까 왜 인간이 오래도록 육식과 잡식의 역사를 거쳐 지금 다시
채색주의를 톺아보고 있는가에 대해 정밀한 이데올로기와 선택도식을 갖춘 책은 많지 않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그에 관해 아주 두꺼운 책을 썼지만, 전 페이지를 관통하는 작가의 생각은
책의 맨 앞쪽,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쟁 중의 일화에 오롯이 담겨있다.

내 독후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래도 샤프란 포어보다는 마이클 폴란 쪽에 더 끌린다는 것.
우리는 그 '딜레마'를 안고서, 베지테리안, 아니 프루테리언이 되어야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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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달렸어. 독일군들이 줄곧 내 등뒤를 바짝 쫓고 있었거든. 나는 먹지 못해서
     점점 병이 깊어졌단다. 뼈만 남은 정도가 아니었어. 움직이기도 힘들었어. 몸이 너무 나빠져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았단다.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먹었지.
     너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먹었단다.

     최악의 상황도 끝이 가까워졌단다. 많은 이들이 바로 그 끝이 다 왔을 때 죽었지.
     내가 또 하루를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어. 한 러시아 농부가 내 꼴을 보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니
     나에게 줄 고기 한 조각을 갖고 나왔단다.

  - 그 농부가 할머니 목숨을 살렸군요

  - 난 먹지 않았다.

  - 안 드셨다고요?

  - 돼지고기였어. 난 돼지고기는 절대 먹지 않아.

  - 어째서요?

  - 어째서냐니?

  - 그게 코셔(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선택, 조제된 음식물)가 아니라서 안 드신 거에요?

  - 그야 물론이지.

  - 하지만 먹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데도 안 드셨단 말이에요?

  -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법이란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2012/04/24 19:36 2012/04/24 19:36

김연수의 신작 장편소설 <원더 보이>는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미스터 버티고)>에서 시작해
이명박(또는 현 정권)에 대한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성실하고 정직한 작가인 김연수는
하나의 성장담을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에돌아 밟으며  
그 와중에서 성 정체성을 선택하는 일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철새를 연구하는 일들을 중요한 소재로 집어넣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을 포함해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해 나가는 것이고, 부모를 잃으면서 더불어
부모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떠돌아 다니면서도 스스로를 증명하고 기원을 만들어간다는 것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너무 많은 것을 가져오는 바람에 책의 초반 부분을 읽는 게
껄끄럽고 실망스러웠지만, 결말에 이르러서야 왜 작가가 이렇게나 많은 의미 붙이기를 시도하나 싶었던 게
거진 납득이 됐다(적극적으로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먼저 읽은 친구는 이 책을 두고
'한국 소설치곤 꽤 괜찮다'고 평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이 소설이 2011년 한국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같은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됐다. 소설 자체로서는 꽤 불안한 균형을 갖고 있지만
소설가로서는 반드시 쓸 수 밖에 없었던 책, 작가라는 함의가 갖는 책임과 무게를 보다 적극적으로
짊어지려고 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원더 보이"가 의미하는 게 뭔지는 알겠다. 그래도 꼭 그 틀을 그렇게까지 빌려와야만 했을까.
그 점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렇지만 아주 단단한 결의를, 껍질 바깥으로 의연히 드러낸 작품.
한국 문단은 마흔이 넘어서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이 원더보이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거기에 나도 지지를 보탠다. 그렇지만 그 지지는 이번 작품에 대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패기에 대하여인 것.
한정적 지지, 비판적 지지를.










2012/03/26 11:18 2012/03/26 11:18

차이

from 책읽기, 간서치의 삶 2012/03/19 08:25

이원규의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를 읽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 학교>를 본 사람이라면
알텐데, 지리산의 '낙장불입 시인'이 바로 이원규다. '고 알피엠 여사'가 그의 부인이고 말이다. <지리산...>와
박남준 시인의 시집 <그 여자네 집>에 이어 이 책을 집어든 건 그저 우연으로 단지 가벼운 책을 읽고파서였다.
진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읽기 쉽고 읽은 후 명랑해지는 책들이 그리워서. 최근에 찾은 책들은 대개
두껍고 무거웠으며 긴장을 요구하고 까다롭게 읽어야 하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읽기 전에 나는 저자가
'낙장불입 시인'인 줄 모르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멀리 나는 새는...>는 <지리산...>와 <그 여자네 집>과 정서적으로 거의 겹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지리산...>을 읽기 전에도 나는 박남준을 알았지만, <지리산...> 독서 이후에 박남준에 대한 이해가 더욱
두터워졌던 것과는 달리, <멀리 나는 새는...>는 <지리산...>와 쌍방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 '낙장불입 시인'이
정말 이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책을 아주 가벼운 산문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저자가 수경 수님과 함께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을 이끌면서
지리산, 새만금, 임진각 등 전국을 직접 발로 걸었던 경험과 감정과 생각들이 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낙장불입 시인'은 <지리산...>에서와는 다르게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전국을 순례하면서 이 땅의 아픈 곳들을
살펴보고 그 상처를 공유하는 데 시간을 바쳐왔다. 그 업의 막중함과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아쉽게도 책은 그 감정과 생각을 설득력있게 전파하기보다는, 그저 장황하게 늘어놓은 측면이 있다.
경로의 무쌍함과 소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멀리 나는 새는...>는 독자의 눈과 마음을 저 깊은 데서부터
흔들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와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 사이의 거리가 문어체로 일체화되어 있는 한편,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저자가 쓴 것 사이의 거리는 구어체로 풀어지지 못하면서 '주파수적 변환'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진정성도 때로는 독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가 꿈꾼 세상은, 서로간의 상처를 함께 보듬는 너른 공동체의 일종이었으나 저자 본인이 체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를 진심으로 바랬는지는 모르겠다. 책의 말미를 보면, 그는 '다시 길동무도 없이 홀로 길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사적 정서, 단독자의 정서, 떠돌이의 정서는 그가 힘주어 말하는 주제와
종종 배치된다. '혼자'라는 감정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고 삶의 근간이어서 책의 곳곳에 출현하는데,
그것이 '따로 또 같이' 상황에 따라 변주되면서 공동체와 홀로움으로 매끄럽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역마살'의 이미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이물감을 자아낸다.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이고 이율배반적인데, 나는 그 점이 저자가 아직 '내적으로 소년'인 정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는 불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꿈이 많은 사람이다.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도 놓을 수 없는 꿈은 사실 또 얼마나 큰 짐인가. 이 책을 읽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길과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원규 시인 자체의 상처를 읽는 경험이기도 하다.
그 소년은 아직 길 위에 있다. 아니, 평생 길 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 위의 기록은, 내면의 풍광이 주가 아니라 길의 풍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속에 담긴 삶의 비의들을
담아내는 데 주력함이 옳지 않을까.  책을 덮고 난 뒤에 남는 진한 아쉬움은 그 자신 제 발로 걸었음에도,
그가 전하는 인생과 길의 풍경이 주마간산격으로 그저 스쳐갈 뿐 내밀한 울림을 전하지 못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주장함으로서 내놓고 드러내기보다 묘사함으로서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랄하게 비판하긴 했지만, 이원규 시인의 시와 산문들을 통털어 폄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책이
여러 삶과 여정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진정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달에 실패했다는 점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이 다음 책은 한층 더 성숙한 모습, 생각과 정서와 삶이 하나로 통합된 풍경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지금껏 지나온 길들은 개인의 상처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적 상처이기도 했다.
그 상처의 딱지에서 우리가 고통뿐만 아니라 삶의 가치들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 그것이
'낙장불입 시인'에게 거는 모두의 기대일 것이다. 성장과 건필을 기원한다.  


2012/03/19 08:25 2012/03/19 08:25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어붙은 세상이 보인다. 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날, 그의 제안이 없는 날,
그와 안 좋았던 날, 세상은 갑자기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나는 수족관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히스테릭한 물건으로 가득차 있으며,
내가 바라보거나 만지는 모든 것들은 나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하루가 죽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조용한 편지함. 답장이 없는 새벽.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 달콤한 슬픔은, 이 세상에 온전히 나 하나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얼어붙은 진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진실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랑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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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오직 그의 신호로만 가득 차 있고, 나는 신탁처럼 그의 신호를 기다린다는 것.
사랑도, 내 삶도 오직 그라는 대상의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놀라운 전환이야말로 우리가 사랑의 가능성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희망과 환희는 물론 고통도, 슬픔도, 불행도 모두 사랑의 연료일뿐.
생을 한 점 남김없이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모두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므로 무대가 사라진 뒤에도 그로부터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것.








2012/02/29 17:25 2012/02/29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