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 詩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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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형도 전집을 읽었다. 문지사의 <입 속의 검은 잎>과 살림의 <짧은 여행의 기록>에다
솔이 발간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몇 편의 습작시, 일기, 메모들이 곁들어진 책이다.
그러니까, 이 전집은 그의 모든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걸 읽다가 아무래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더 좋았던 것 같아 함께 펼쳐놓고 번갈아 살폈더니 전집에는 없고 <사랑을 잃고...>에만 있는
그의 친구들의 발문이 아주 탁월해서 그렇게 느꼈다는 걸 알게 됐다.
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소설가 성석제가 쓴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과
생전에 그가 아끼는 후배였던 시인 장정일(이때는 장정일이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다)이 쓴
"기억할만한 질주, 혹은 용기"가 특히 훌륭했다.
장정일의 글을 읽고서 펼쳐보는 기형도의 시 '기억할만한 지나침'은 확실히 다시 읽힌다.
결국 기형도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멈추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그 울음을 외면하고
비정해지지도 못했다. 그 안간힘의 자리가 기형도의 자리다. 겹눈으로 자아와 현실을 인정하고
수락하면서도 끝내 거기 익숙해지지 못했던 근대적 인간의 그늘이 시들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기형도는 우리 시대의 윤동주가 아니었을까. 산업화 시대의 윤동주, 도시 속의 윤동주 말이다.
나도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끝내 거기 머무를 수 밖에 없었는가를
가만히 되묻고 싶을 뿐이다. 그 너머의 자리가 근대 이후, 비로소 '다음'일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