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제 여든 넷이 됐다. 젊은 시절, 빛나던 재능으로 동경과 서울에서 명망을 높인 그는
천명을 알게 된다는 이순의 나이에 고향 제주섬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변시지의 화풍은
급격하게 변모하는데, 80년대부터 그림에 '바람'이 스며들게 되면서 마침내 경지에 이른다.
황톳빛 섬과 회색 돌담집, 키큰 해송과 마른 까마귀, 사람 하나와 말 한 마리는 폭풍같은 바람 속에서
때로는 격정을 담고 때로는 그리움을 드높인다. 무엇보다 섬을 세차게 뒤흔드는 바람 속에서
오브제들은 제 각기의 물성을 놓고 한 가지 정감으로 뭉친다. 그의 대작 앞에 서 있노라면
그대로 태풍 속에 갇힌 것만 같을 정도로 그림은 생생하게 보는 이를 진동한다.

작가는 이제 나이가 들어 30호 이상의 작품은 그리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30호 미만의
그림들만 보더라도, 그가 아직 늙지 않았으며 여전히 재능과 격정으로 번뜩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물론, 규모의 힘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대작을 만나는 것은 더없이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모 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바람에 가 봐야 할까 아닐까를 수없이 망설이다
마지막 전시일인 오늘에야 들르게 됐다. 제주 화가 이름을 여럿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제주적인 화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2011년 서귀포에 건립예정인 변시지 미술관에 그의 작품 500여점이 기증된다고 하니
제주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 그림으로서의 제주섬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후에 들러봐도 좋겠다. 단언하지만, 당신은 변시지를 만나면서 그간 당신이 적어왔던
제주 화가의 리스트들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섬의 색을 한 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줍잖은 이들이 제주의 아름다움을 논하면서
찬사의 도구로 수많은 낱말들을 들먹였으나 제주섬의 색은 도저히 몇 개의 단어나 레토릭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그 담아낼 수 없는 한 순간, 바다가 섬과 만나고 바람을 거스르며
지상과 천상을 분간 할 수 없는 지독한 한 순간을 변시지는 그린다. 그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도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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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저 편 너머", 1992, 출처는 http://www.unionpress.co.kr/news/detail.php?number=65321&thread=02r03r01





2010/08/31 20:29 2010/08/31 20:29

고종석의 따끈따끈한 신작 장편소설, <독고준>을 읽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최인훈에게 바친다'고 밝힌
이 책은 <광장>과 <회색인>으로 한반도 해방공간을 가로지르던 작가 최인훈에 대한 헌사이며 동시에
최인훈의 저작 '회색인', '서유기'의 2부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책은 첫 장부터, 고종석 특유의 문체를 드러내며 독자들을 아름다운 모국어의 세계로 흡인한다.
극중 독고준 그러니까 최인훈의 딸이 화자인 이 소설은 최인훈의 연대기를 근간으로 해 현대사를 논하지만
독고준의 세계관이나 화자의 화법, 문장의 스타일에 있어 고종석의 문자향이 물씬 풍기면서 소설 너머로
작가 자신이 아른거리는 맹점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의 문체가 너무나 도드라지는 까닭이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은 최인훈을 빌리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고종석 자신의 자전적인 한국사 회고일 거라는
의심은 그런 면에서 우군을 얻는다. 

또한 <독고준>은 극중 독고준의 죽음을 자살로,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에 몸을 던진 것으로
설정함으로서 그의 생애를 노무현과도 얼추 겹치게 만드는 효과를 조장하고 있다. 저자는 그럼으로서
자신이 노 전대통령에 가진 연민을 '광장' 이후의 한국인들이 경험한 비극적 정치 세계에 덧씌우고
그리하여 책의 후반부인 이 땅의 최근대사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독고준은 최인훈과 노무현
그리고 저자 자신의 공통점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회고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나는 책을 반 가량 읽었다. 준엄한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오래된 팬으로서, 아름다운 우리말로
산문을 내놓는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한국어에 대한 언어학적 탐구의 결과물을
막 내놓기 시작한 아카데미스트 고종석의 신참 당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제야'로 본격적
소설로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한 소설가 고종석의 따뜻한 독자로서(소설적 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기자들'은 논외키로 하자) 그의 신작을 오래 기다려 왔다. 물론 이같은 형태의 장편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으나.

아직 반밖에 읽지 못한 독자의 평가로서는, 솔직히 이 책이 <엘리야의 제야>보다 소설적으로 더
훌륭한 작품같지는 않아 보인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엘리야의 제야> 뒤를 잇고 있다기보단
<기자들>의 조금 나아진 버전같다. 한국 현대사를 제3자적 입장에서 새로이 그리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창대했지만 그 의지가 결과물의 완성도를 좌우할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지닌 채
책을 들고 있다. 당연히 이 불안이 개인적인 착각이나 환시이길 바라고 있지만 말이다.  

<독고준>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대한민국 60년 뜨거운 정쟁사 어느 곳을 관통하고 누구를 다시 세울 것인가.
저널리스트이자 문학인인 고종석의 입장을 들어보는 일은 흥미롭겠다. 거기에 최인훈과 노무현을 덧붙여
무엇을 조명하려 들 것인가. 독자는 과연 <회색인>과 <서유기>의 후일담에 기반해 이상주의자(최인훈)와
실패한 개혁우파(노무현), 언어에 집착하는 로맨티스트 저술가(고종석)의 합일에서 무엇을 기대하게 될까.

아직 결론에 이르기는 멀었지만 나는 자꾸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이 불안은 그저 오독일까.
고종석은 자서에서 픽션은 픽션일뿐이라고 했지만 어른거림이 너무 짙다.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세 가지의 중첩된 입장은 거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추상성과 모호함을
덧씌우고 경우에 따라 각기의 자리로만 후퇴하는 약점을 만든 건 아니었을까. 기우이길 바란다.

 
2010/08/30 22:13 2010/08/30 22:13

지금 키보드 옆에는 한 장의 티켓이 놓여져 있다. 1층 C열 176번이라 쓰여져 있으며, R석 그리고
*** 신포니에타 내한공연 이라고 적힌 손바닥만한 표 한 장이. 그렇다. 나는 클래식 공연엘 다녀왔다.
콘서트는 커녕 뮤지컬조차 한번 관람하지 않은 내가. 평생 자신을 위해 음반 3장도 사지 않은 내가.
베토벤이나 하이든은 고등학교 음악수업 때 이름을 들어본 것이 마지막인 내가 직접 비용을 지불하고
정통 클래식 연주회장에 다녀온 거다. 어쩌면 내 인생에선 '사고'에 가까운 특별한 해프닝.

여행중이라 지방에 있었는데, 연일 폭염특보가 내려 산자락이 아니면 걸어다니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한낮에는 영화관에 있던가 카페를 찾아 열을 식혔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매일 닥치는 한낮의
더위가 지겨웠다. 서울이 아니어서 독립영화관도 거의 없었고, 볼만한 영화 리스트도 바닥이 나
카페에서 음료수잔만 비우다 보니 무료하기 그지없어 검색 끝에 처음으로 클래식 공연을 고르게 된 것이다.
졸리면 자면 되겠지, 게다가 명망을 가진 국제적 신포니에타의 내한공연인데 가격도 영화값과 비슷하니까
밑져야 본전 이라는 생각이었다.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2천석이 넘는 대공연장.
무대에 쏠리듯 반원형으로 배치된 1,2층의 객석이 이채로웠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신포니에타Sinfonietta란 약간 작은 규모의 심포니를 말한다. 프로그램에서
확인한 현악기 위주의 40여명 이 동양 신포니에타는 꽤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연주될
목록은 모두 모짜르트의 것들. 제목을 읽어도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는 한심한 귀와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도 모짜르트니까 알게 모르게 그동안 내가 들었던 곡들도 있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영화나 광고 음악 등으로 이날 내가 들었던 곡들은 꽤 낯이 익었다. 고전 음악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훨씬 더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방학 시즌이었고, 가격이 파격적일 정도로 싼 데다, 부제로 '여름 음악 수업'이란 게 붙어 있어서인지
그날 객석을 메운 2천명 중 80%는 아이들, 초등학교 3학년 정도부터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십대들이었다.
그들이나 나나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정도는 비슷할 터. 아이들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연주를
기다렸는데 과연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장내가 무척 소란했다. 연주회가 절반 쯤 지난 후부터는
집중력을 잃은 아이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해 주의를 준 적도 몇 번 있었고.

아무튼 연주는 시작되었다. 지휘자의 힘찬 손짓을 시작으로 기대보다 훨씬 낮은 음량에서부터 피어올라
부드럽고 온화하게 공연장 구석구석에 젖어들었다. 솟아오르는 호른, 종종 존재감을 비추는 큰 북,
노래하듯이 지저귀는 여러 대의 바이올린과 낮은 음으로 감정을 골라주던 첼로, 움직일 듯 흔들리는
콘트라베이스까지... 음악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30대 남자의 귀에도 또렷한
음률을 흘려넣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지만, 눈 앞에서 진심을 다해 연주되는 프로들의 공연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연주회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저 단조로운 움직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음악을 만들면서 행해질 때에는 기대한 것 이상의 흥겨움과 재미가 있었다. 앵콜마저 끝나고
객석이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물결로 분주할 때에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더 들었으면 좋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만큼.

김혜순의 시 '한 잔의 붉은 거울' 가운데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이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신포니에타의 공연도 내 안에 그렇게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연주자들의 한 무리였다가 그들 전체가
하모니를 이루며 굽이치는 음악이 되어 내게 들어왔다가 그 들어온 음악들이 내 안에서 들끓는 것 같은
아주 새로운 변이.

언젠가, 내가 열심히 노래를 들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연주회를 찾아 공연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리거나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매일매일 돌아다니는 날이. 그 모든 날이 아니 온다 해도 그날 공연을 듣는
기분과 마음은 참 그윽했다. 그 붉은 기운이 훌륭한 책을 읽고 난 다음처럼 몇일 동안 내 혈관을 돌아다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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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10:08 2010/08/23 10:08

한 사회학 도서 한 권이 한반도 남쪽을 흔들고 있다. '정의'를 다룬 이 책은 정의의 대한 개념과 역사,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정의란 지금 우리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복합적으로 설파한다. 하버드, 석학,
명강의라는 태그로 수식될 이 책은 우리 땅에서 개발독재정권의 가열찬 공격적 드라이브와 더불어
뜨거운 반향을 얻고 있다. 얼마 전에는 까다로운 개념서로는 처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달성했다고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노동이 모욕받는 시대, 법적 정의란 가진 자만을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요즈음에 정의에 대한 탐구란
사실 좀 미심쩍은 데가 있다. 위의 책이 정의에 대한 논쟁사를 거쳐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애국적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꼽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애국은 근본적으로 무관한 가치일 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정의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부도덕과 도덕, 반민주와
민주, 정의 대 부정의로 구분되는 단순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단 한 번도, 무엇이 더 나은 가치인가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을 한 적이 없다. 국민들의 MB에 대한 혐오는 방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대한
문제다.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 자체가 저열하거나 노골적인 건설 숭배, 자본 독점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점에서 갑자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그저 생뚱맞다.

게다가 이 책 역시 의심쩍은 부분으로 가득하다. 이런저런 입장들을 소개하면서 공평한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저 저자가 취하고 있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줄곧 충실하게
공정한 분배를 외면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찬양하며, 공동체주의의 현실적 반동성을 애써 외면한다.
안타깝지만 이 책이 주창하고 있는 정의는, '합리성을 지닌 우파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노무현-유시민 세력과 차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같은 정파적 관념을 우리는 5년간 실제로 경험한 바 있다.
미안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MB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무제한적 개발을 옹호하며 반노동적이고
유사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을 겪어봐야 결국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이 땅에는 수많은 독서 캠페인이 있고, 여러 조사에서 한국인은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해지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 다만 그것이 회사에서 나눠준 책이거나 유명한 사람이
쓴 책, 재테크나 경쟁에 도움이 되는 책들일 뿐이다.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는 이들이 많지 않다.
독서란 사실 가장 내밀한 행위, 개인만의 도락인데도 말이다. 너나없이 위기론을 말하는 인문학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단 사실은 반갑지만, 결국 그 책이 내포하는 가치란 反개인이라는 의미에서
이쩌면 이 사건은 하나의 비극이다.

뉴스에서는 연일 '4대강'에 대한 논란들이 나오고 있고, 새로 내정된 내각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범죄자다.
그럼에도 책읽는 이들은 위선적인 권력자들과 현실에서 맞부딪히기 보다는 관념의 수준에서 자신이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해주는 책들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게다가 그 책은 생각만큼 도덕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우리의 문제는 망가지다 못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작금의 현실이 아니라 한 번도 현실과
대결하지 않고 위협이 일 때마다 힘없이 사그라들고 마는 '비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Q도 아닌데
우리는 언제까지 '정신 승리법'만을 쓸 것인가? 여행중에 수없이 만나는 강줄기들의 참혹한 공사현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침묵한다면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2010/08/21 14:33 2010/08/21 14:33

칸이 사랑하는 한국의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인 홍상수의 신작 "하하하"는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유쾌한 작품일 것이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본 후
"우울한 영화"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에서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직업 없는 백수 조문경(김상경 분),
직업 있는 백수 방중식(유준상 분)이 통영에서 만나는 왕성옥(문소리 분),
안연주(예지원 분), 강정호(김강우 분), 노정화(김규리 분) 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진지해서 되려 폭소가 터지지만 등장인물들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블랙코미디를 벌인다. 영화는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 동일한 인물을
서로 엇갈리며 사랑과 시와 치정을 변주하는데,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언제나 한 가지로 엮이면서도 그 어느 것으로도 머물지 않는다.
홍상수는 지식인을 혐오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이상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불모의 존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 혐오나 업신여김의 근본은
언제나 기억의 왜곡과 관련이 있어보인다. 즉, 홍상수는 루이스 브뉘엘이 말했던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들의 기억은 우리들의 일관성이자
우리들의 이성이며, 우리들의 행동이며, 우리들의 감정이다. 기억 없이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란 발언을 거꾸로 적용하는 듯이 생각된다.

홍상수는 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이 비참한 희극을 연기하는 서푼짜리 오페라를
끝없이 반복 변주하는 것일까. 그것은 강정호(김강우 분)의 대사처럼 "아무리 유치해도
내 길을 가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조문경(김상경 분)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연습인 것일까.

변화는 진화일까. 진화는 관념일까. 관념은 영화일까 또는 내 자신일까.
이 영화는 조문경(김상경 분)과 방중식(유준상 분)의 호접몽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저 술자리의 넋두리를 액자로 다시 꾸민 메타텍스트일까. "하하하", 오래 기억에 남을 영화다.
점점 발랄해지는 그의 영화들, 참으로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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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23:18 2010/05/18 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