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말하기, 산문'에 해당되는 글 4건

  1. 침묵 2012/04/23
  2. 부품 (8) 2012/03/29
  3. 분식점 2012/03/05
  4. 부가네 얼큰이 2012/02/20

침묵

from 생을 말하기, 산문 2012/04/23 12:58

침묵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수많은 의미들을 웅변한다.
침묵은 대답하지 않는 대답으로 흔히 쓰이지만, 똑같이 질문에도 적용될 수 있다. 질문하지 않는 질문,
그것 역시 침묵이다. 일견 세상은 말없고 조용할 뿐이지만, 그 안에는 발설의 형태로 제기되지 않은
수많은 침묵의 질문과 침묵의 대답이 있다. 다만 그것을 애써 확인하거나 명료하게 결론짓지 않을 뿐이다.

침묵은 가장 좋은 점은, 침묵하는 본인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게 이야기의 진행을
떠맡긴다는 것이다. 주도권은 질문하는 이가 아니라 침묵하는 이에게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이 넘어오면
계속 침묵하면 된다. 상대는 침묵하는 이에게 대답을 얻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심해야 한다. 반면 침묵하는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질문에만 입을 열어 대답하면 된다. 침묵은 그 자체로 인정도 불인정도 아니다. 그러나
침묵은 대체로 완강한 거부의 의미를 띤다. 답을 얻기 위해 숱한 질문을 쏟아내는 이 앞에서의 침묵은
나는 그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뜻 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 대해 반대한다는
포괄적인 의사표시도 된다. 침묵은 단순히 말과 말 사이의 찰나가 아니라 엄중하고 심오한 언어 그 자체이다.

나는 당신의 침묵을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떤 질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침묵은 당신의 대답이지만
동시에 내 질문이기도 하다. 아마 거기에는 일단락이 없을 것이다. 그와 나는 다른 뜻을 침묵으로 전하고 있지만
결국 그 뜻이 가 닿게 되는 지점은 동일하다. 어떤 인사나 의식없이, 이 침묵과 침묵을 끝으로 당신과 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눈 셈이다. 말은 사실 얼마나 제한된 도구인가. 그에 반해 침묵은, 말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웅대한 전달 수단이다.

침묵을 침묵으로 돌려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이와 같으니, 삶 역시도 침묵으로부터 시작해 소리로,
언어로 영글었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나는 침묵에 대해 어떤 서운함도 아쉬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듣고자 했던 것과 듣지 못한 것, 들을 수 없는 것을 더해 나는 받아들인다, 이 절절한 소통을.
그리고 그 대답으로서, 말하고자 했던 것과 말하지 못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더해 나 역시 전언을 보낸다.
걸맞은 응답은 하나뿐, 그 역시 침묵일뿐.

 






2012/04/23 12:58 2012/04/23 12:58

부품

from 생을 말하기, 산문 2012/03/29 22:46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갈 때면 맨 먼저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휴대폰의 날씨 위젯(widget)의 기준 지역을
전주에 맞추는 일이다. 대개는 견훤성지가 있는 교동에 때로는 모악산이 자리한 중인동에.

대개 전주는 서울보다 기온이 2도 정도 높고,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바람도 덜 부는 편이다.
여름에는 더위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 열섬 현상으로 아주 뜨겁지만 그밖의 계절은 서울과 비교하면
상당히 포근하다 할 수 있다.

일전에 영화제 집행위에서 일했을 때에는, 동국대 부근의 서울사무소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전주에는 팀장 회의차 1달에 1~2번 내려가는 정도였다. 단, 영화제가 시작되는 4월에는
모든 스텝이 전주에서 근무해야 하므로 4월 초순부터 한달 반 가량을 전주에서 기숙했다.
집행위에서 얻어준 방에서 잠만 자고, 영화제가 폐막할 때까지 줄기차게 야근을 거듭하는 것이
매해 4월의 일과다. 가끔 전주에 내려가는 일과는 다르게, 개막일을 카운트다운 하면서
한달 반을 잠자는 시간 빼고 사무실에서 일하노라면 진이 빠지기 일수였다.
영화의 거리 부근 가맥집이나 삼천동, 서신동 막걸리촌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 외엔
따로 낙이 없었다.

전주에 마음을 사로잡혔던 것은, 몇 년 전 서울국제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게스트로 초청받아
전주영화제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다. 전주가 틀어주는 영화도 하나같이 훌륭했고,
저녁이면 게스트들을 모아 풍성하게 차려주는 밤의 파티도 근사했다.
무엇보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스탭들이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성적이었던데다
영화제와 상관없는 식당들에서 보여주는 푸근한 친절이 특별했다.
아침이면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뜨끈한 콩나물국밥, 5천원(지금은 6천원)에 테이블이 가득차도록
40여가지 반찬을 깔아주는 백반집도 감동적이었다. 전주에 사는 후배 하나와 깊이 인연을 맺게 되면서
영화제가 끝나고도 줄기차게 전주를 놀러다녔다. 서울에서 우울해지면, 그냥 터미널로 가서는
고속버스를 집어타고 전주 영화의 거리를 한 바퀴 돈 다음, 후배와 가맥 몇 잔을 나눠마신 후
밤기차로 서울로 올라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종로에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금요일, 불현듯 병이 도져
버스편으로 전주로 내려왔더니 전주는 아직 따뜻하여 기분좋게 밤 산책을 즐겼던 날도 있었다.

그때, 내가 전주에 가졌던 인상은 따스함이었을 것이다. 전주에게도, 전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러다 인연이 닿아 전주영화제 집행위에서 일하게 됐다. 지방 특유의 텃새가 있어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아
무척 고생했던 초반이 생각난다. 그래도 전주는, 전주 사람들의 품은 변함없이 푸근했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준 후배 P, 적응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했을 때
술자리에서 고민을 토로하자 그 자리에서 형님으로 삼아주면서 끝까지 예의와 대접에서 극진했던 K,
늘 온화한 얼굴로 속내를 들어주었던 S, 본인이 가장 힘들면서도 항상 나를 먼저 도와주려고 했던 K,
내가 일하고 싶다고 하자, 면접조차 보지 않고 합격통보를 해주고는 후방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H형까지....

전주영화제 집행위에서 근무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전주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맡은 건 영화제 일, 어쩌다 다른 곳에서 청탁이 오곤 해도 전주에서 영화제 주관 업무 말고
원고작성을 본업으로 할 수는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우연히 전주와 영화제의 배려로 전주에 관해 끄적일 수 있게 됐다. 영화제 일과 원고 작성
두 가지가 모두 제안이 왔지만, 나는 원고 일을 선택했다. 그게 영화제 근무에 비해 여러모로
불리한 부분이 있어도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오래된 욕망이고, 현실을 꿈과 중첩하는 일이니까.
한계를 절감해야 하지만 그걸 무릅쓰는 만큼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이니까.

여전히 내 주소는 전주에 있다. 그렇지만 기존에 하고 있던 일이 있어 서울과 전주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신세가 됐다. 한달의 반은 전주, 나머지 반은 서울. 워킹화와 등산복을 입고, 등산배낭에는
물통과 노트북, 세면도구를 챙겨서는 전주의 이곳저곳을 밟는다. 서울에서도 도서관을 찾아
전주를 읽어 정리해두고, 인터넷으로 지역 신문과 잡지, 전주 정보를 갈무리한다. 늘 전주 지도를 펴서
내가 걸었던 곳, 행여 빠뜨렸던 곳을 체크한다. 나는 3년 전, <제주 풍경화>를 냈을 때와 같은 자세로
전주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변했고 세월도 흘러, 원고는 제주의 그것과는 색깔이 많이 다르다.
새로운 글을 쓰는 건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이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한 꼭지 한 꼭지
풀어나가고 있다. 마감을 앞두고는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해 하지만,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중이다.
마침내 전주가 내 몸에, 머리에, 손에 그리고 내 문장에 붙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주에 내려가면서 휴대폰의 위젯을 바꾸는 일은 하나의 다짐같은 것이 된다. 마음과 몸을 다해
이 일에 임하겠다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조금 더 나아지겠다는 각오.
그 위젯을 교동이나 중인동에 맞추면서 나는 몸의 부품을 갈아끼운다고 생각하고 있다.
잡지의 청탁으로 짧은 한 꼭지만 쓰는 일이 아니라 전주를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다시 그리고
현재를 과거와 미래와 아울러 중첩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결국 나는 전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허락받았다고 믿는다. 내 세계관과 개성을 바탕으로
전주를 새로이 조각하는 일, 그것은 말 그대로 내 세계를 만드는 일이며, 속깊이 나를 긍정하는 일이라고.

위젯(widget)의 본래 말뜻은 '부품'이다. 나는 이 연재를 위해 종아리 근육과 폐활량, 우뇌와 손목을 갈아끼웠다.
앞으로는 귀와 입, 허벅지 근육과 눈도 바꿔끼우게 되리라. 글로 세우는 전주의 재건축은 사실
내 자신의 재건축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일단 원고의 완성도로 판가름날 테지만 그 너머, 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 것인가가 더 궁금하다.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은 모험이지만 꼭 그만큼
신선하고 생기발랄해 질 것이다. 지난 몇 달 간, 본격적으로 전주를 누비면서 나는 이제 전주 길의 절반을
지도가 아니라 내 몸에 새겼다. 이제는 더이상 영화의 거리와 한옥마을만이 '내 전주'가 아니다. 곳곳의 산과
사찰과 산성, 시장과 건물, 사람들과 풍경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내 전주는 바야흐로 크게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원고가 원고로 끝날 지, 그 뒤에 새로운 몸을 얻게 될 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변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추동하고 싶었던가, 내적으로 안되면 외적 강압으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인연이 닿았고 길이 펼쳐졌다. 성장이란 자신을 바꾸는 일, 머물지 않고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교체하는 작업.
고백하건대, 나는 전주를 사랑한다. 이 연애는 막 불이 붙었다.



2012/03/29 22:46 2012/03/29 22:46
Tag //

분식점

from 생을 말하기, 산문 2012/03/05 08:14

지금 사는 집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걸어가면 시장이 하나 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십여 곳
작은 점포들의 거리. 그곳을 시장이라 불러도 좋을 지 사실 잘 모르겠다. 너무나도 작은 상점가인 까닭이다.
생선가게와 닭집, 그릇가게, 야채상, 반찬가게, 김을 구워파는 집... 지나가면 약간의 호객이 있고,
흥정과 덤이 가능한 오래된 시장의 모습이 거기 아직 살아있다. 열쇠 하나를 복제할 일이 있어
처음으로 그 길목을 구석구석 누벼보게 됐는데, 시장은 생각보다 속이 깊은 곳이었다.
도로 양 옆으로 길게 펼쳐진 것만이 아니라 가지마냥 중간중간 이어지는 좁은 길목들로
더 작은 가게들이 혈관처럼 퍼져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건을 보고 난 후 별안간 출출해져서 그중 좁은 분식집 한 곳에 들어가 떡볶이, 순대와 오뎅을 시켜놓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자니... 지금은 만나지 않는 동갑내기 친척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참 순하고 착했던, 그러나 이제는 지나치더라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그녀가.

아버지의 누이가 몇 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형제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난다.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양평동에 사는 제일 큰아버지 한 분과 서대문 큰아버지 한 분(아버지의 둘째형)이 계셨다.
아버지는 삼형제중 막내로, 제사나 기타 다른 일들로 두 큰아버지댁을 방문하는 일이 많았다.
양평동 큰아버지댁은 슬하에 자식이 많아, 사촌형과 사촌누나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서대문 큰 아버지댁은 자식이 셋이었는데, 그중 둘째인 딸이 나와 동갑이었고, 막내인 아들은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다. 국민학교 때까지 양쪽 집을 숱하게 들락거리면서 나는 주로 서대문 큰아버지댁 사촌들과
친하게 지냈다. 양평동 제일 큰 아버지댁 사촌들과는 나이 차가 꽤 있었고, 성정에 있어서도
서대문 사촌들이 더 너그러웠던 덕분이다.

그때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고만고만한 살림을 나고 있었지만, 서대문 큰아버지댁이 유독 손님 접대에 손이 크고
후한 편이었다. 특별히 수입이 더 좋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사정을 헤아려 본다면, 아마도 둘째 큰아버지께서
막내 동생 가족에 유난히 더 푸근하게, 융숭히 대접했던 게 아닌가 싶다. 때로는 매주 찾아간다 할 정도였는데
그때마다 큰아버지 내외는 늘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띄우시고는, 올 때마다 극진히 좋은 것들을 찾아 먹이시고
떠날 때는 용돈까지 두둑히 쥐어주셨다. 부모의 태도는 자식에게 그대로 옮겨지는 법. 동갑인 둘째 딸과
한두 살 차이의 막내 아들도 우리의 방문을 늘 반가워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 즐거운 한때를 나누어 주었다.  
떠올려 보면, 그 시절 서대문엘 찾아가는 일은 내 유년의 가장 빛나는 행복 가운데 하나였다.
사촌 남매는 만사를 제치고 나와 놀아주었고, 큰아버지께서는 '뭐 갖고 싶은 것 없니?', '뭐 먹고 싶은 것 없니?'로
그 즐거움을 한껏 배가시켜 주셨다.

철없던 나는 집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둘째 큰아버지댁에서 맘껏 누렸던 것 같다. 방학이면 아예 그 집에
눌러앉아 며칠씩 살기도 했고, 큰 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서울의 이곳저곳을 호사롭게 다니면서 심심함이나
외로움을 모르고 자랐다. 사촌 아이들은 순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남자 사촌동생은
제가 산 새 프라모델을 내게 선물하기도 했고, 여자 사촌누이는 본인도 아직 다 보지 않은 잡지 '소년 중앙'을
먼저 보라고 쓰윽 밀어놓기도 했다. 그건 어느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는, 예외적인 일이 결코 아니었다.

짚어보자니 서대문 큰아버지 가족들의 뭉클함이 다시금 몽글몽글 떠오른다. 그 시절은 참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정말로 좋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매번 자신의 것들을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유난히 풍족하고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 것을 포기하고
나를 위해 좋은 것을 양보했던 까닭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되던 어느 여름날, 내가 그 집에서 자다 깼던
새벽이 기억난다. 그때 큰 아버지 식구들과 나 다섯은 안방에서 함께 자고 있었는데, 전날 과자를 많이 먹고
잠든 나는 새벽에 목이 말라 부스스 눈을 뜨고는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잠시 혼몽했던 적이 있다.
아직 어둑한 사위가 눈에 익은 후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잠버릇이 심했던 나를 위해 큰집 식구들은
가장 큰 요와 시원한 삼베이불을 넓직히 덮어주고는 방의 구석에서 겹치듯  잠들어 있었다.
내 베개 맡에는 행여 내가 잊어버리고 갈까 봉투에 든 용돈과 신형 장난감이 고이 챙겨져 있었다.
아, 내가 큰 아버지댁에 있구나라는 인식 바로 뒤에 찾아온 생각은,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었다.
그 어린 것은 그렇게 철이 없어, 그 뒤로 은혜를 갚기는커녕 끝간 델 모르고 점점 더 기고만장해졌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은 일몰처럼 한 순간에 저문다. 무슨 일에선가 아버지 형제간은 서로 왕래하지 않게 되었고, 사춘기에
들어서며 머리가 큰 나는 교회를 다닌다는 핑계로 제사에 불참을 선언했다. 그 일로 부모님과 오래 다퉜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중학교 이후로, 내가 아버지쪽 친척집을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가끔 부모님 편으로 소식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동갑 사촌 누이가 이번에 무슨 상을 타왔다더라.
남자 사촌 동생이 어디 학교에 들어갔다더라 하는 정도. 이십 년이 지나도록, 우리가 얼굴 볼 일은 없었다.
유년의 짧은 행복은 그렇게 끝나고, 나는 길고 긴 어른의 계단을 외로이 올랐다. 가끔 사촌들이 떠올랐지만
기억은 빠르게 퇴색해갔다. 삶은 누구에게도 녹록치 않아 나와 그들 모두 여러 번 힘겨운 인생의 단계들을 거쳤다.
스물 넘어 부모님이 내게 전해준 그들의 소식에는 아픈 데가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성장했거나 혹은 고통을 덜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오래만에 사촌들의 근황을 전했다. 남자 사촌동생은 미국에서 학교를 나와 현지에서
부동산 일을 하느라 이민 수속을 밟는 상태이고, 동갑 사촌 누이는 오래 교제해 온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큰 아버지가 외롭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미국에서 정착하고, 딸은
분가하게 됐으니. 얼마 뒤에 다시 듣는 근황은 또 달랐다. 사촌 누이가 결혼하기로 했던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으며,
새로운 남자친구와 옛날 서대문 큰 아버지댁 부근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군. 한번 찾아가 볼 수도 있겠군. 결혼이야 그들의 일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고, 나는 다만
누이의 얼굴이 궁금했다. 옛날 그 순하고 착했던 그 얼굴이 아직 남아있을까. 여러 번의 풍파를 거치고서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뿐, 직접 내가 찾아가게 되는 일은 없었다.
바빠서, 귀찮아서, 어색할까봐. 나는 아주 가끔 머리 속에서만 그 행복했던 시절을 곱씹었을 뿐이다.
현실이란 사실 얼마나 성가신 것이며 또 궁색한 것인가. 서대문은 내게 제주 섬보다 먼 곳이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는 다시 사촌 누이의 근황을 알려주셨다. 그녀와 새 남자친구가 함께 살고 있으며
그 옛집 근방에 조그만 분식점을 하나 차려 직접 장사하고 있다 했다. 내가 찾아가지 않았던 20년 동안
큰 아버지댁은 작지 않은 부를 쌓았다. 건물도 세우고 그밖의 부동산도 여럿이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남자 사촌동생을 유학을 보냈고, 동갑 사촌 누이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 번듯한 집을 얻어주기도 했다.
'장사'란 말은 내게 이물감을 불러일으켰다. 순한 성격에 평생 보살핌을 받아온 그녀가 장사를 한다고?
그것도 식당을? 책과 펜대 말고는 국자도 거의 잡아보지 않았을 그녀가? 나는 어리둥절했다.
큰 아버지는 자식 교육의 일환으로, 딸내 부부가 자립하기를 바라신 듯 했다. 일절 아무런 지원없이
그들이 부부의 힘으로 어렵게 분식점을 끌고 가고 있다는 얘기가 연이어 들렸다. 말이 분식점이지,
열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떡볶이와 오뎅, 순대 정도를 파는 간이 포장마차 규모라고 했다.
큰 아버지가 모지시구나, 아니 엄격하신건가. 내 머리 속에선 이십 년 전의 그모습 그녀가 분주하게
떡볶이를 만들고 오뎅을 끓이고 김밥을 마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도 세월이 훌쩍 흘렀으니
그녀도 인생에 훨씬 더 능숙해졌겠지. 그들이 무사히 성업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소식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 동네의 경쟁은 치열하고, 그들은 고전중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분식집이라 한들, 생전 처음 해보는 음식 장사가 어디 만만하겠는가.
결국에는 그 분식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하는 폐업의 이유란 이랬다.
'떡볶이나 오뎅을 팔고 있으니까 우습게 보이는지 아예 사람으로 취급을 안해주더라구요.
 억울하고 분해서요. 다른 장사를 찾아볼래요.'

시장 한길가의 좁은 분식집에 들어앉아, 나는 주인네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예순 즈음의 할머니가
깁밥을 말고, 서른 정도 되는 아들와 며느리가 떡볶이를 삶고, 오뎅과 순대를 덥히며, 서빙을 맡는 분업 형태다.
가게 유리창 바로 건너에는 또 다른 분식점이 보이고, 그 바로 옆에는 또 한 곳의 분식점이 눈에 띤다.
메뉴는 모두 비슷하다. 떡볶이, 오뎅, 순대... 어느 곳은 김밥을 팔고 또 어느 곳은 튀김을 팔고, 또 어느 곳은
쫄면을 내놓는 정도의 차이다. 자동차도 드나들지 못하는 좁은 골목에 세 곳의 분식점, 경쟁은 자연 뜨거울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시킨 순대와 떡볶이와 오뎅을 기다리는 동안, 먼저 든 손님이 2천5백원짜리 순대를 포장해
문을 나설 때, 그 세 식구는 일제히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를 외치며 연방 몸을 굽신거렸다.

마침내 시킨 게 나왔다. 오뎅 그릇에는 새로 썬 파와 김이 알맞게 뿌려져 있었고, 떡볶이는 국물도 많고
어묵이 많이 들어가 푸짐했다.  순대도 '이게 1인분이야' 싶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이렇게 팔아야 하니
이문도 얼마 남지 않을 것이다. 값은 7백원(오뎅 한 꼬치)에서 2천원(떡볶이), 2천5백원 (순대).
그 가게에는 2천5백원을 넘는 메뉴가 없었다. 제일 비싼 우동과 계란라면도 모두 2천5백원이었다.
세 식구가 하루 종일 꼬박 일해야 이 생활이 간신히 유지되는 게 아닐까. 늦은 저녁이면 가끔 귀가하는 취객들이
포장해 달라며 반말지꺼리를 내뱉기도 하겠지. 누군가를 먹이는 일은 사실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그 거룩한 일은 어떤 경로로 수모와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천한 일이 되는가.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양이 푸짐했던 접시를 모두 비우고, 계산을 부탁했다. 순대를 썰고 카운터도 담당하는
젊은 며느리는 '3천9백원이요' 라고 답했다. 나는 1만원을 내밀며, 잠시 생각해보고는, '5천9백원이네요' 하며
말을 건넸다. '아 떡볶이도 있었네요, 죄송합니다'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렇지만 죄송한 것은 나였다.
하마터면 그 세 식구의 정당한 노동을, 그 댓가를 멋모르고 소홀히 치뤘을 뻔했으니까. 많이 파세요, 라며
가게를 나서는 내게 예의 그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가 셋의 합창으로 따라붙었다. 나는 괜시리
안타깝고 또 미안해졌다. 분식점 식구들에게, 이제는 얼굴도 모를 사촌 누이에게 그리고 점점 더 험해져만 가는
이 세상에게.

사촌 누이가 지금은 분식점 자리에서 악세사리 가게를 열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경쟁은 변함없이,
극도로 치열할 것이다. 일은 조금 편해졌는지, 수입은 괜찮은지, 속은 어떤지 나는 한번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물을 수 없겠지. 그것은 이십 년만에 불쑥 찾아온 옛 사촌이 물어볼 계제가 아니므로,
우리는 공감하고 삶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므로, 그러므로 예의가 아니므로.  생활을 끌고 가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누구에게 특히 수월할까마는 나는 사실 그녀만은 각별한 예외, 걱정 없이 고생 없이
마냥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던 어린 시절, 내게 베풀었던
그 마음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므로. 미안하므로. 이제 우리는 그저 타인이므로.

집에 오면서 꼬마아이건 학생이건 배움이 길건 짧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누구에게든 나는
평생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며 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행여라도 한 순간 건방지지 않도록.
그것이 내가 극히 미약하나마, 그녀에게 빚을 갚는 방법일테니.
이 어리석고 때늦은 환급이 수신인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떡볶이가게, 악세사리점은 내 사촌 누이의 집이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상점들, 모든 가게들은
내 큰집이다. 그를 운영하는 이들은 내 행복의 후견인들이었으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베품을 선사한
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만나는 순간, 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들과 인사하고, 마음을 헤아리며
그들의 노동을 옹호할 것이다. 사랑받았으니까, 행복했으니까, 잊을 수 없으니까. 모두 행복하기를, 부디,
오래도록.  



2012/03/05 08:14 2012/03/05 08:14

어제 강정에서는 다시 집회가 열렸다. 아니, 열렸을 것이다. 계속 일이 있었고, 다시 다음주 초에도 미팅이 있어
섬에 내려가 보지 못했다. 소속 단체 두 군데에서는 연이어 메일을 보내왔고, 그중 한 군데에서는 요번에 처음으로
'깃발'을 세울 것이니, 그 깃발을 찾아오면 더불어 집회를 할 수 있다 알렸다. 늘 혼자 강정 '싸움판'을
찾았던 나로서는 더없이 기껍고 고마운 조치였다. 무릇 모든 싸움은 외로운 것이지만, 그 싸움판에서조차
혼자 서 있는 일은 종종 혹독하리만큼 고독한 일이다. 이제 그 외로움도 조금 덜해지려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까.
강동균 강정마을회장님이랑 얼굴이 익은 평화활동가들, 시민단체의 대표님과 사무처장, 사무국장님들 얼굴이
눈에 어린다. 무슨 장, 무슨 대표 이러니까 굉장히 높은 사람들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사실은 두서넛 밖에
안되는 상근활동가들을 이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같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사람들. 투쟁은 그렇게
순박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을, 악쓰고 모질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을 우리가 나눠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그들이 대속해 앞장서는 것뿐. 그러니까 정말 모질고 악바라진 사람들은 폭력과 권력을 이용하는 한줌의
나쁜 놈들만이 아니라 침묵하고 외면하여 그 사람들만 진창으로 내몰리도록 만드는 우리 대다수가 아닌가 라고
잠시 생각해 봤다.

지난 금요일에 오랜만에 술 몇 잔을 마셨다. 동네 닭집에서 가슴살 튀긴 걸 몇 조각 사다가 사둔 와인과 함께
먹었다. 평소에 치킨 같은 건 거의 먹지도 않고, 아니 그 이상 외식 이런 것도 거의 안 하는 편이지만
가서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서울에 있게 되니 답답하고 아쉽고 그래서였다.
와인은 괜찮았는데 튀김닭은 딱 그냥, 튀긴 닭맛이었다. 하긴 만원도 하지 않는, 브로일러 닭을 기름에 튀긴 게
그렇지 뭐.

여행을 이유로 하든 집회를 이유로 하든, 섬에 가게 되면 저녁엔 꼭 술 한 잔씩을 곁들이게 된다.
제일 좋아하는 곳에 마침내 왔다는 행복감,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가세하지만 무엇보다 천연의 맛좋은
먹거리들이 거기 그득하기 때문이다. 3만원이면 단골집들에서 자연산 회를 맛볼 수 있고, 날것이나
다름없는 싱싱한 생선을 조리거나 마늘 넣고 끓여먹는 냄비요리도 서울의 밥값 가격이면 먹을 수 있다.
보말이나 성게 넣고 끓인 국도 훌륭하지만, 한편으론 제주도에서 키운 돼지나 소, 닭으로 만든 요리도 일품이다.
모자반 넣고 걸쭉하게 끓인 몸국이나 우거지와 선지, 콩나물 넣고 끓인 선지국 한 그릇이면 아침이 편안하다.
저녁에는 고기 몇 점 구워 술추렴 하기도 좋고 함께 온 이들미 많다면 교래리 부근에서 백숙과 샤브샤브,
죽까지 나오는 닭 한 마리 요리를 즐기는 것도 잘 맞는다. 좋은 친구들과 낮에는 산과 바다 깊숙한 데를
거닐다가 저녁이면 따뜻한 불빛 아래 모여 소곤소곤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재미가, 내가 섬에서 찾는
최고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사실 이제 습관처럼 섬을 찾게 된 지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겨벼렸고, 지금도 꾸준히 섬에 대해서는
읽고 찾아보고 공부하는 버릇을 놓고 있지 않은 까닭에 섬에서 사실 내가 모르는 장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요사이 내가 눈여겨 보는 곳들은 섬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로 시장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거나 선술집들로 그 일상성과 친근함이 중점이 되는데, 그중 한 곳이 '부가네 얼큰이'다.
닭발이나 닭날개를 매운 양념에 무쳐 구워내는 이 매운닭요리 전문점은 서울에서는 이미 몇 년 전에
유행이 지나간 품목이고, 제주에서도 사실 그 위세가 많이 꺾여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섬이 매운 맛을
꾸준히 선호하는 지, 서귀포나 제주시는 물론 표선, 모슬포, 함덕 같은 크지 않은 동네에서도
이 '부가네' 체인점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섬이라고 특별히 좋은 닭을 쓰는 건 아니다. 사실 1인분에 만원 이쪽저쪽 하는 서민 대상의 구운닭 안주에
집중가축사육시설에서 대량생산한 브로일러 닭 외에는 원가를 맞출 도리가 없을 것이다. 대신에 부가네는
그 벌충을 요리의 과정에서 채우고자 하는데, 칼집 넣고 천일염 두툼하게 뿌려 참숯에다 구워 내는 게 그 방법이다.
숯에 그을리면 향기도 그만이고 맛도 좋아져서 맥주나 와인이랑 먹기에 아주 좋다. 난 걔중에서
불닭발도 불날개도 안 먹고, 오직 '닭날개 소금구이'에만 열광하는데, 살도 많고 맵지도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두루 입맛에 잘 맞는 듯 하다. 보통 시장통에 있는 가게이니 가격도 저렴하고 말이다.
기름에 튀긴 통닭을 시켜먹느니 왠만하면 참숯구이 양념닭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섬에서 야식이 필요한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시라. 배달도 된다.

부가네 얼큰이는 삼도동 북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가게가 본점인데, 확실히 체인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맛을 낸다.
삼도동이라고 하면 대부분 잘 모르시겠지만 관덕정 뒷편, 탑동 바다에서 오리엔탈 호텔 뒤편으로 찔러가면
금방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라마다 호텔, 오션 스위츠 호텔, 제주서울관광호텔, 팔레스 호텔,
오리엔탈 호텔, 탑모텔 등 탑동 부근에서 묵고 있다면 쉬 걸어서 갈만한 곳이다. 좀 구석진 골목에 있는데다가
인테리어는 낡고 조명도 침침한 편이지만, 그래서인가 왠지 술꾼의 향취를 북돋우는 아련한 데가 있다.
속마음이란 원래 어두운 데서 훨씬 더 잘 드러나고 전달되는 게 아니던가. 그럴 때, 오래된 술집은
하나의 풍경, 한 순간 아롱지는 진짜 삶의 배경이 된다.

지금 나는 몇 개의 고비를 넘고 있고, 그 과정 속에서 한 뼘 더 성장할 지 혹은 밀려 퇴보해 버릴 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와중에 있다. 그저 최대한 성실하게, 그 고비에, 생의 질곡에 응답하기 위해
그때그때 전력을 다할 뿐이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아니 그 이상 강정에도 계속 갈 것이고,
삶이 내미는 시험지에도 명운을 걸고 답을 써내려갈 것이다. 한 고비 넘을 때마다 또는 간신히 평지를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하고 평가해 주기도 하면서 한땀한땀 나만의 무늬를 그려볼 것이다.
여행도 가고, 술도 마시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며 나는 내 인생의 코스를, 그 어디에도 견주지 않고
저만의 속도로 달려보고 싶다. 한계를 절감하면서 때로는 모자란 재능을 탓하면서, 게으른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코스를 완주하길 원한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 일단락을 짓고나서 흠뻑 땀흘려 몸이 축축한 때에
구운 고기 몇 점을 놓고 술 한 잔을 곁들여 그 달콤한 환희, 숙제를 털어내는 시원한 후련함이라면
나이먹는 위로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 그런 장소가 섬이고, 부가네 얼큰이이며,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그건 내가 지금의 소소한 생활을 지켜가는 한 그리 어렵지 않게 지속할 수 있는 일이니까.
검박함은 내 일상의 표지와도 같은 것이니까.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수도 없이 많다. 빛나는 인생도, 아름다운 사람들도 별처럼 많다.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던 적도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거기서 맛과 빛과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그 삶을 누구에게 보여주기 보단, 내 스스로에게 증명할 것이다.
모자람은 모자란대로, 넘침은 또 넘치는 대로, 평생을 내 원하는 시간에 쏟고자 한다.
낮에는 생활을 꾸리는 일, 저녁이면 영혼을 살피는 일, 창 밖에는 물, 눈 앞에는 친구,
손에는 술잔, 입으로는 이야기. 그 소소함을 만들고 지키는 일, 사랑하는 일, 늘 다시 소소해 지는 일.
그것이 나의 일생임을 지금 확인한다. 활활 타오르기보다 늘 꾸준히, 고만하더라도 지근하기를,
부디.



 


2012/02/20 08:01 2012/02/20 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