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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과 흔적 2010/06/29
  2. 출렁이는 당신에게, 일렁이는 감람색 바다를 (6) 2010/06/25
  3. 간난(艱難) 2010/05/29
  4. 명랑(明朗) 2010/04/13
  5. 그 집 앞 (2) 2010/03/04

삶과 흔적

from 생을 말하기, 산문 2010/06/29 13:38

군대를 다녀와서 학교에 복학했을 때 들은 수업 중의 하나가 '문예창작 실기론'이었지요.
훌륭한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실기 전용 수업이었어요. 매주 수업 3시간동안
교수님께서 내주신 주제로 글을 써 내고, 다음주 초에는 가장 좋은 글을 발표하고 또 새로운 글을
써내는 수업이었지요. 시를 쓰기도 했고, 단편소설을 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사 준비를 하다보니 옛날 글들이 좀 나왔는데...그때 수업에 냈던 글 중의 하나에요.
교수님이 주신 주제는 '통속'이었고, 상세하게는 "늘 가까운 데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이성을 상상하고 그에게 프로포즈하는 편지를 써라. 단, 이 수업에서 냈던  3편의 시를 모두 다 사용하고,
통속적이되 통속적이 되지 않도록 묘미를 살려라"라는 주문이었지요. 아마도 리얼리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관해 파고들어가 보는 수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연애편지를 쓰는 과제였어요.

그때 쓴 글입니다.
날짜를 보니 1998년이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기 남겨둡니다.



========



L에게.

  앞으로 쓰여질 이야기는 다음의 세 편의 시를 기초로 해서 펼쳐진 희망없는 노래들이야. 그 세 개의 졸시들, 제목부터 먼저 말해지는 것이 좋겠지.

    그림이 있는 풍경
   빛나는 전화기
   없는 길


  글이라는 것에 가장 큰 욕망을 두고, 긴장을 띤 채 백지나 흰 모니터 화면을 대한 지는 좀 오래되었내. 잘 쓰여질 때도 있고, 잘 쓰여지지 않을 때도 있지. 그렇지만 이런 사적인 글, 아니 사적일 수밖에 없는 글을 쓰려 할 때 나는 가장 곤혹스럽네. 흐름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겠지. 글 자체의 긴장 이외에, 받는 이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겠지. '좋은 글'에 대한 공포와 '당신'이라는 공포, 이 두 개의 부릅뜬 눈 아래서 뭔가를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네. 그래서 이 글은 적어도 메일이라는 형식으로는 보내지지 않을 거야. 인터넷이나 디지털(0과 1로 리얼한 것과 언리얼한 것들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은 진정성을 담기에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나, 아주 느리게 이 편지를 쓰려고 하네.

  그래, 아무리 시간을 끈다고 해서, 여러 가지를 미리 생각해 둔다고 해서 그 공포들이 덜어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냥 이야기를 할께. 최소한의 형식으로.

1. 그림이 있는 풍경

     그림이 있는 풍경1

술 잔뜩 취한 뒤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목이 타 눈 뜬 새벽,
가로등 빛살 새어들어오는 창문으로
드문드문 불켜진 산동네 머리 맞붙은 집들과
음영짙은 그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빛과 인간이 순간에 빚어낸
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벽한 풍경화 같을 때가 있다.
사랑도 그런 것일까.
왜 하필 거기 당신이 서 있었는지,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모습,
왜 당신의 내면 드러냈는지
물 한 잔 마신 후 다시 잠들어
아침이면 모두 사라질, 아무 것도 아닌
잠깐의 착각이이겠지만
끝내 질끈 감고 돌아서버릴 수 없었던
당신, 내가 함께 있는 그 쓸쓸하고 초라한 풍경이
술 깬 지금도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다만 우연이었을까 그 때, 거기와 당신,
날카로운 칼날로 그 시간 도려내 내 한 쪽 눈에
못 박아두고 싶다. 나머지 한쪽 눈은
늘 그 그림만 보고 있으리.


  내가 당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래, 몇 번을 다시 물어봐도, 정색을 하고 다시 생각해 봐도 당신은 틀림없이 '이상한 사람'이야. 당신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아무리 봐도 당신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고, 아무리 가까울 때에도 당신은 일정한 거리를 가지지. 당신은, 유리벽 너머에 있는 존재야. 아무리 두들겨도 통곡을 해 봐야 당신에게는 들리지 않고, 당신은 날 보지 않고, 끝내 소통되지 않지.. 당신은 무섭고, 당신은 난해하며, 당신은 혹독하지. 당신과 있으면 늘 겨울이고, 몸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고, 매번 똑같은 병에 걸려.

  당신에게는 힘이 있어. 힘이 있다고 생각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의 글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과 술을 마시거나 이런저런 삶의 고통 이야기를 풀어냈을 때부터 그, 힘은 늘 강력하게 작용해 왔어.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당신의 삶 주위에 떠돌게 된 것은 그 힘 때문일지도 몰라.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껴.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일까. 당신이 삶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는 것. 당신이 언젠가 이 삶을 박차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느끼는 것. 당신이 아직 당신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 그게 다일까.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당신을 만나면 시간이 급해. 처음 일을 맡은 영업사원처럼 쩔쩔매고, 늘 실수를 하고, 한없는 자괴감에 빠지지. 당신의 그런 힘은 아주 오랫동안 내게 영향을 미쳐 왔어. 나는 당신을 대비해 삶을 기른 적도 많아. 공사(公私)를 비교적 확실히 구분하게 된 것. 현실적인 능력을 축적하는 것. 술과 담배에 견디는 것. 뭐 그런 것들이 결과로서 지금의 내 삶에 남아있지. 실제 당신과 만나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자잘한 것들 또는 흔적.

  그렇지만 결국은 흔적만이 삶이기도 하지.

  당신과 만난 기억들은 내게 사진이 아닌 그림의 형태를 띠고 있어. 생동감과 현실성이란 두 측면에서 그 기억들은 현저하게 약점을 가지지만, 시간에 견디고 나름의 분명한 색감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그 기억들은 의미를 지니지.

  당신이 있는 풍경, 쓸쓸하지만 늘 따뜻했고(당신은 아주 간혹 자신의 따뜻함을 힘겹게 드러냈었지), 미래가 없었지만 행복한 현재였고, 고통을 수반했지만 한 번도 싫지 않았지.

  아주 오래 당신을 좋아한 것 같아. 사랑을 포기한 이후로도.

  이상함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가치야. 모든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신뢰는 친밀함에서 비롯돼. 그런데 친밀함은 이상함과 적대적인 위치에 놓여 있어. 그런데 왜 나는 '이상한' 당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 '이상함'은 늘 나를 괴롭히고, 한 번도 편하게 만들어 준 적이 없음에도 나는 왜 못내 당신을 잊지 못하고 항시 찾는 것일까. 왜 당신과 있는 시간들만 따로 떼어진 채 그림으로 남는 것일까. 그 짧은 달콤함, 잊지 못하는 것일까. 당신은 내게 힘든 존재인데.

  내가 느끼는 당신의 '이상함'은 내 천성적인 이끌림에 대한 단순한 '이름 바꿔붙이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냐.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이상하다고 느껴. 당신의 이상함에는 당신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그 치명적인 힘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 어떤 부분을 못내 포기하고 마는 것. 현실에 대해 지나치게 경주하는 것. 때로는 엄격하다 싶을 정도로 절제해 버리는 것. 너무 쉽게 탐닉에 빠지는 것. 나는 그것들이 주사위의 여섯 면들처럼 당신의 '이상함'을 구성하다고 있다고 생각해. 그 주사위의 핵, 당신의 이상함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해.

  문제는 내가 당신을 이상한 채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못한 채. 또는 그 거부감에 저항하면서도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당신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책이라는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서의 텍스트이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것은 익숙한 언어로 통용되어 있지 않고, 보다 직접적인 영상으로 영혼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아무튼 나는 그 텍스트를 조금 더 지켜보면서 해석하고 싶어. 빨리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없이,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네.

2. 빛나는 전화기

    빛나는 전화기

밤 11시 반, 땀에 절은 몸
을 끌고 지하철역 통로를 지나올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
다만 무슨 마술같은 잊음이라도 있어
눈 뜨면 집 안 자리깔린 침대로
이동해 있었으면, 간절히 바라보며 걸음 빨리 할 때,
흘낏 옆눈으로 쳐다 본 공중전화기가
순간, 놓인 자리 뒷면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한다
그 빛, 차츰 커지고 밝아져 전화기 내부가
투시도처럼 다 비치고
그 빛, 빠르지 않지만 침착하게 주변의 사물 덮어나간다 아니
지하철역 전체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나 아연하다
오직 한 전화기만 빛난다 또는 보이는 것은
그 전화기, 환하게 빛무리져 크게 떠오른 그 전화기뿐이다.
조심스레 발을 옮겨 다가선다
그 빛, 서서히 주변을 에워싸고
나,

그 전화, 수화기 들고서 통화하고 싶다
아주 간절히
당신에게로.



  두 번 째 이야기는 내 과거에 대한 헌사(獻詞)의 성격을 띤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당신과 보지 못한 시간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어차피 소통은, 단순한 꿈일 수도 있고 나로서는 그 꿈 앞에서 내 전체를 진지하게 재현해 낼 수밖에 없다. 내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가 필요하다.

  당신하고 몇 년 간 거의 보지 못한 때가 있었다. 한 3년 정도의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나는 아주 자주 전화기를 들었다. 그 전화기에 당신의 번호를 눌러 실제로 연결된 횟수와는 달리 '꿈으로서의 전화'는 내 삶에서 일상적인 일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당신과의 전화는 연결이 잘 되는 편이었다. 벨도 그리 오래 울리기 전에 당신이 받았고, 나는 질문을 던지고(잘 지내는지, 뭐하고 사는지), 답을 듣기 무섭게 일정을 확인하고(그렇군. 근데 요즘 바빠? 오늘 저녁은 혹시 시간 있어?), 답을 듣곤 전화를 끊는다(음...그렇군... 다음에 편할 때 다시 전화하지 또는 그럼 이따가 보자구). 거기에는 2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와 용기가 필요했다. 말해야 할 사항을 잊지 않도록 메모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수화기를 들며, 통화가 끝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나는 그 전화에서 내 조바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너무 오래 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내가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단순한 안부가 아닌 용건(오늘 H랑 S랑 같이 보기로 했거든...)을 항상 준비했으며, 내 현재가 불안하게 일렁일 때에는 한 번도 전화 연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 나름의 사랑을 해 왔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에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에도 나는 당신에게 전화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집착이었을까? 나는 이기(利己)를 채우면서 장식으로 당신을 갖고 싶었을까?

  당신을 생각하면, 아주 오래 방황했던 내 자신이 먼저 떠오른다. 방황은 얼마나 진부한 용어인가. 그러나 방황은, 실제로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나는 그 시간을 늘 부정해 왔고, 전화가 연결된 후나, 직접 만난 후에도 늘 그 시간을 후회하곤 했다. 아,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 나는 왜 담배를 끊듯 당신을 끊어내지 못하는가.

  그렇지만, 전화기는 아직도 빛난다. 5년이 넘는 시간들을 지나서도, 어떤 장소에 있어서도,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당신을 생각하기만 하면 모든 전화기는 나를 제외한 모드 사물을 어둠으로 덮어버리고 가장 환하게 빛난다.

  나는 당신에게 전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 가련한 시도를 긍정하고 싶다. 그 한심할 정도의 짧은 순간이, 내 안에서 부정이 아니라 계속 소망으로 자리잡길 원한다. 단순한 착란이었다고, 홍역같은 열병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

3. 없는 길

    없는 길 3

1.
눈이



시작한다 뉴스에서는 첫머리로 기상경보를 올리고
20세기 최대의 추위를 경고한다 난방기구가 동이 나는
백화점, 슈퍼에서는 라면이 매진되고 늙은이들은 버려진다
석유가 모자라는 3차 오일쇼크가 일어나고 모두들 체온을
아끼려고 입조차 열지 않는 미증유의 3월이 열린다 마침내
길은 얼어붙고 자동차는 냉장고가 되고 안팎의 온도차로
모든 유리창은 설탕처럼 부서진다 눈이 그친 후에도 추위는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매섭게 추위를 부른다 휘잉 위힝
바람은 냉동된 가로수들을 잘게 흩뿌리고 얼음들은
서로 달라붙는다 종말은 이렇게 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불의 20세기는 이렇게 얼음으로
끝나는 것 미국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

길에 쌓인 얼음들은 서로 만나고 단단해지고 거대해져
지상의 건축물을 무너뜨린다 고가도로와 육교도 허물어지고
고층의 아파트와 휘황한 성가들도 분가루로 날린다 그 위로
얼음들은 새로운 길을 만든다 엄청난 얼음기둥이 만나고

또 만나 빛나는 얼음의 다리를 만든다 아무도 꼼짝하지
못하고 동사해가는 봄, 그 다리는 나의 집에서
너의 집까지

나의 집에서
너의 집까지 오직
하나의 길을 만든다

그 길로

너에게 간다
세상 모든 길을 잊고 죽음에도 무감각하면서
그 다리와 함께 끝끝내 투명하면서 눈물처럼
다시 눈이
                                    내
                                    리
                                    고
네게 얼음꽃 바쳐 생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살 것이다 그때는 당신도
내가 더 이상 차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
따뜻한 겨울이었다. 한 번도 혹독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다 왔어. 약간의 추신(追伸)이 붙을 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겠지.

  앞에서 다뤘던 세 편의 졸시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네. 첫째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것. 둘째는 당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 셋째는 내 자신에게조차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했으면서도 오랫동안 간직되어 왔다는 것.

  그 세 가지는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합리적인 이유는 하나도 들지 못하면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가 길어지고, 상당히 조심스런 형식을 가졌으면서도 가장 위험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생의 몇 구비에 단속적으로 방점을 찍으면서 힘겹게 지속되어 왔다는 점.

  '사적인 편지를 보내도 좋은가'라는 내 물음에 당신은 화를 냈었지. '부담이 될 일이라면 안 보내는 게 좋겠다'며.
  그렇지만 이 글은 결국 쓰여질 수밖에 없었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보내지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 정말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지난 월요일, 당신과 정말로 오랜만에 오랫동안 술을 마시고,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난 듯 했어. 아주 긴 시간이 흐르도록 찾을 수 없었던 당신을 겨우 다시 찾은 듯 했거든.

  그 술자리로 당신이 아프고, 이틀만에 얼굴을 다시 보게 된 당신은 그 시간들을 또 없었던 시간으로, 잠깐의 일탈로 자리매김해 버리려는 듯 해. 그것은 당신의 옳은 판단일지도 모르지. 나와는 무관한.

  걱정할 것은 없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좋아. 나는 공적인 부분을 확실히 지킬 거고, 현실에서는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꺼야. 약속하지.

  당신과 내가, 서로간의 그 먼 거리를 무너뜨리고 손을 붙잡은 것은 지금까지 세 번이야. 어린애들말로 삼세판이지. 나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없는 길'이 세 번이나 있었던 셈이지. 밟으면 바로 허방이 되어버리고 마는. 물론 대부분의 경우, 내 잘못 때문이었을꺼야.

  그래서 더욱 포기할 수 없었나 봐. 당신의 이상함, 또는 당신을 이상하게 보는 나의 이상함, 당신을 이상하게 봄으로써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는 내 진짜 이상함을 밝히고 싶었어.

  그것이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지라도 또는 그것이 잘못된 일일 지라도
  나 당신을 사랑해. 진심으로.



  그래, 결국은 사랑한 흔적만이 삶이야. 그렇지 않니?

 

                       
                                                                        - 1998. 12.







2010/06/29 13:38 2010/06/29 13:38


2010년 7월호, 패션지 '하퍼스 바자' 특별판 'BAZZAR PURE'에 실린 글입니다.
잡지 그대로를 보시는 게 가장 좋지만, 원고 내용을 눈여겨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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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당신에게, 일렁이는 감람색 바다를
- 정원선(‘제주 풍경화’ 저자)


  기자와 뉴스에디터로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이 우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에서 치뤘던 월드컵이 있었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드는 노란색 젊은 대통령 후보가 있었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7~8년 전이다. 나는 그때 이름을 대면 알만한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 뉴스를 담당하고 있었다. 정치와 스포츠, 전쟁 같은 여러가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거치면서 인터넷이 우리 일상과 긴밀하게 달라붙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신문 같은 올드 미디어가 포털 뉴스의 속보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소통을 따라잡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시장을 내주면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아직 20대였던 나는 새파랬지만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뉴스 하나를 포털 메인 페이지에 올릴 때마다 백만에 가까운 숫자가 실시간으로 그에 반응했다. 그 시절, 내가 취해있던 것은 네티즌들과 함께 꿈꾸던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그저 아주 간편한 소통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때,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뉴스를 쉼없이 업데이트해야 했지만 그 일은 이라크 전쟁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즐거웠다. 세상의 변화가 내 손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방송과 잡지 등 여러 곳에서 취재가 들어왔고, 스카우트 제의도 빗발쳤다. 일은 힘들었지만 어깨가 으쓱한 시절이었다. 주말을 내쳐 일하면서도 그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연봉 인상이나 승진으로 보상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지만 몇 년 간 그런 일과가 이어지자, 몸과 마음 양쪽에서 무리가 생겼다. 사건이 생기면 무조건 대기해야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태에 계속 긴장하며 뉴스를 만들어 내는 일에 알게 모르게 지쳐갔던 것이다. ‘남들처럼’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직장을 옮겨 대기업으로 이직하게 됐다. 옮기고 나니 월급도 크게 오른데다, 그룹사 뱃지가 주는 안정감에 저도 모르게 종종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그렇지만 일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일 없이 연봉만 퍼주는 곳은 없었다. 대기업으로 옮겨와서도 밤낮없이, 주말없이 일하는 패턴은 변함없었다. 결국 나는 주말마다 휴대폰을 끄고 이 땅의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녔다. 고성, 대천, 남해, 속초, 제천, 부산, 목포, 강릉, 변산, 통영… 소심했던 나는 여행지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보곤 했었는데, 그 와중에 사건이 터져 여행지에서 PC방을 찾아 뉴스를 원격으로 올려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상사가 휴대폰 음성메시지에 ‘일이 터졌는데 왜 연락이 안되냐’며 욕을 한 뭉텅이 남겨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멀리 떠나온 일조차 다 소용없는 것처럼 허망하게 느껴졌고 나는 아무데도 마음놓고 쉴 곳이 없구나, 쓸쓸히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다 제주에도 가게 됐다. 아무것도 모를 때라 항공-호텔-관광이 하나로 묶인 여행사 주말 단체상품을 이용할 때다. 가이드를 따라 45인승 버스에 올라타선 한심하고 재미없는 관광지만 신물나게 돌아다닐 때였는데… 휴대폰이 또 울리는 거였다. 거의 울상을 하고선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사였다. 일이 또 생겼다면서 나보고 어디냐고 물었다. 제준대요 하고 답했더니 상사는 전과 달리 잠시 말이 없었다. 그뒤로 한참을 머뭇머뭇하더니, 거기까지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좀 쉬어라, 내가 알아서 해보마고 했다. 전화를 끊고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것도 공식적으로 주말에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진 셈이었다. 그후로 버스가 닿는 여행지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제주를 흡입하듯 관찰했다. 이렇게 달콤한 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모르니까. 돌 하나, 흙 한 점, 꽃 한 잎, 파도 한 결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전화 때문에 흥분했는지, 그때쯤 들른 제주의 명승지가 특별히 더 근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그날,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고 숙소의 창 너머 하염없이 제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낮의 떠들썩한 여행지들과는 달리 차분하고 고요한 밤하늘 하래 꼭 쓰다듬어주는 것 마냥 부드러운 음색의 물결 소리가 더없이 황홀해 잠드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신기하게 그 뒤로도, 상사는 내가 제주에 있다고 하면 더 이상 일에 관련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 후로는 거의 제주만 다녔다. 몇 번을 내려오게 되자, 내용이 그게 그거인 버스 단체 여행 같은 것은 자연스레 피하게 됐다. 렌터카를 빌려 유명한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서너 번이 넘자 렌터카회사에서 제공하는 지도 책자로는 갈만한 곳들이 드물어 졌다. 서울에서 제주도에 관한 가이드북을 사고, 인터넷을 뒤져 안 가본 곳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많지 않아 호기심을 채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윽고 나는 제주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찾아읽기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제주도 일간지를 구독하고, 제주섬에 관한 것이라면 도서관을 뒤져 현재의 책은 물론 일제시대 기록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4.3 같은 쓰라린 현대사, 그보다 더 오래 전 제주가 하나의 국가였을 때부터 이어진 뿌리깊은 슬픔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렇게 제주도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상처 입은 제주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자 섬을 여행하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지게 됐다. 육지사람으로서 바다에 대한 무조건적인 ‘로망’에서 벗어나 제주의 특색이 오롯이 담긴, 특별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장소들을 찾아갔다. 사진가 김영갑 선생이 사진을 찍었던 중산간 마을과 제주신화가 여전히 숨쉬고 있는 혼인지, 화산폭발로 용암이 흘러넘쳐 기이한 지형을 이룬 안덕계곡과 방선문, 정치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삶과 자연을 파괴하는 안타까운 반복의 현장 강정마을과 4.3 평화공원 등을 돌아보면서 관광지나 여행지가 아닌 제주를, 조금씩 더 깊이 사랑하게 됐다. 정신없이 바쁜 뉴스 에디터 일을 그만두고 좀 더 한직으로 돌면서도 제주를 삶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계절마다 한 번 씩 비행기표를 끊다가, 그 간격은 두 달, 한 달, 2주로 줄어들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2009년에는 출판사의 제의로 제주사진산문집을 쓰게 되어 마침내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에 내려와 살게 됐다. 제주는 내 일의 휴식지에서 내 삶의 거처로 변모했다.

  책에도 썼지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대상은 물론 결국은 제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되는 일이다.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 서울의 그럴듯한 고등학교와 대학교,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추구했던 것들은 대개 허영이거나 남들을 따라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큰 아파트에 살고, 중형차를 굴리며, 일주일에도 몇 번 씩 백화점과 쇼핑센터를 누벼야만 행복해 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바람 부는 오름의 능선, 옥빛 물결이 모래를 말갛게 씻는 조그만 바닷가, 반딧불이가 공중에 선을 긋는 저녁의 고샅길, 초록의 변주가 온몸을 휘감는 한라산의 한낮, 플라네타륨(Planetarium)처럼 별판이 모조리 켜지는 우도의 한밤… 그 속에서 나는 온전히 행복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땅의 다른 곳과는 계절감이 확연히 다른 이 섬이 내는 특유의 먹거리들에도 스스럼없이 친숙해졌다. 크고 이름난 맛집이 아니라 섬이 지켜온 역사처럼 오래 붙박여 살아온 사람들이 이웃들을 챙기면서 제 삶까지 가꾼 소박한 식당들과 가까워지게 됐다. 책에서 소개하는 여행코스나 식당들도 바로 그런 곳들이다.

  책에 소개하지 않은 곳 가운데 표선해수욕장이 있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넓은 모래사장을 품고 있는 표선은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걷는데만도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광활한 바다다. 썰물 때면 사람들은 신발을 손에 쥐고는 물이 빠진 대형 축구장만한 부드러운 모래밭을 발자국을 남기며 수평선까지 걸어볼 수 있다. 새벽녘이면 크넓은 해수욕장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에 뒤덮인다. 표선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바다다.

  표선은 작지 않은 읍내를 가까이에 둔 전형적인 바닷가마을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대기업 리조트가 세워지면서 상업의 비린내가 동네에 빠르게 침투해 들어왔다. 가장 싼 식사메뉴가 만원을 홋가하는 식당도 생기고, 양식 생선과 곁반찬으로 한상 차려내고서는 계산서에 15만원씩 적어놓는 횟집들이 늘어난다. 낮은 지붕의 오래된 민박과 제주 전통 음식들을 고집하는 낡은 밥집도 있지만 표선에서 그들은 이제 뒤로 비껴 서 있다.

  그럼에도 제주가 좋은 곳인 까닭은 자본과 非자본이 아직 공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휘황한 도시의 너머에는 바다가 여전히 쪽빛 물결을 출렁이고, 쭉 뻗은 도로를 10분만 달리면 산자락과 오름이 살가운 곡선을 드리운다. 바람은 돌틈 사이를 빠져나와 버스의 차창을 두들기고, 사람들은 과속하는 자동차들 건너에서도 둥근 입매를 내보인다. 표선 역시 짙은 화장을 덧바른 대형 점포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삶과 지역을 지켜온 토박이들의 거칠지만 속깊은 가게들이 점점이 빛을 뿜고 있다.

  표선의 춘자싸롱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조그맣고 연약한 가게다. 표선읍사무소 부근의 방 한 칸을 세내 간판도 없이 장사하던 할머니는 2년 전, 코끼리마트 앞의 번듯한 점포를 얻어 공간을 넓혔다.이름도 춘자국수로 바꿨다. 질좋은 멸치를 오래 끓여내 오늘 삶은 소면에 붓고 송송 썬 파와 고춧가루 한움큼을 뿌려선 양은냄비에 담아내는 국수 한 그릇은 메뉴판을 확인하고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저렴하다.

  면적을 키웠다고는 하나 농담으로도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게는 점심을 전후한 두어시간 동안은 합석이 필수다. 서너 시쯤 점심 손님들이 빠진 후 가게를 들러 국수를 주문하면 의의로 상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할머니가 국수를 새로 삶아 내주는 까닭이다. 점심 장사야 찾는 이들이 많으니 미리 삶은 소면을 준비할 수 밖에 없지만, 그때가 지나면 가능한 적은 양만 삶아 맛이 살아있는 국수를 손님 앞에 내놓고자 하는 것이다. 속도 모르는 이들은 국수 한 그릇이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고 철없이 할머니를 채근하지만 말이다.

  제주에서도 나는 가끔 내가 사는 세상이 싫어진다. 조용한 해촌에서도 불콰하게 취해 종업원을 괴롭히거나 모래밭에 욕지기를 하는 관광객들, 세미나인지 워크샵을 와서는 상사랍시고 부하 직원들에게 술잔을 돌려대는 직장인들, 중국산 양식활어를 가져다가 근해 자연산 희귀어종이라며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들, 렌터카로 바닷가를 한번 휙 가로지르고는 별로 볼 것도 없다며 쓰레기나 버리고 가는 사내들... 돈은 어쩌면 이토록 끈질기게 섬의 구석까지 따라붙는 것일까.

  환멸과 쓸쓸함에 섬에 온 시간마저 움푹 괴어 무거울 때, 치료약은 딱 한 가지다. 춘자싸롱의 국수 한 사발. 표선읍사무소 4거리를 찾아가 작고 헐한 가게, 샷시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는 할머니께 "멸치(국수) 하나요"를 외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국수가 아닌 정성을 한소끔 삶아, 시지 않은 깍두기 아니 잔정을 곁들여 아득하고 삭막해진 가슴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저 시치미를 떼고,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삼키고 국물을 비우면 된다. 가게를 나올 즈음이면 가게의 반투명 창으로 비치던 햇살처럼 말갛게 마음이 개어 있을 테니. 나는 그 진료비와 약값으로 천원짜리 두어 장만 내면 된다. 그 병원은 웬만해선 쉬지도 않는다.

  말이 길었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제 삶이 출렁거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직 스스로의 삶을 부릴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들에게 나는 일렁이는 제주의 감람색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거문오름의 깊숙한 곶자왈 지대에 데려가고 싶다. 춘자싸롱의 멸치국수 한 그릇이나 항구식당의 자리물회 한 대접, 종달리의 조개국수 한 사발을 내놓고 싶다. 당신은 그 앞에서 다만 아연하거나 질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 삶을 움직인다는 걸. 그로 인해 우리 삶도 더불어 아름다워진다는 걸.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내 권리일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시 전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는 걸.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우리 세계의 비밀이라는 것을, 경험한 자들만이 소곤소곤 서로 통하는 지상의 종교라는 것을.

  아직 이 특별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이들에게 성심으로 제주여행을 권한다. 다른 준비물은 전혀 필요치 않다. 당신 자신의 눈으로, 다만 설렘을 지니고 섬을 가만히 바라보시기를.

  행운을 빈다.





[제주 풍경화]
http://www.yes24.com/24/goods/3746150




2010/06/25 21:39 2010/06/25 21:39

전셋값이 진정세를 보인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회사의 큰 프로젝트 때문에 잠시 신도시 부근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어 나도 지난 2년간 내 집을 세주고 신도시와 교통편이 닿는 서울의 도심 부근에다
세를 얻어 살았다. 회사의 프로젝트도 끝나고, 나도 그동안 다른 삶의 외피를 얻어 값비싼 도심에 살
필요가 더이상 없어졌다. 지난 달 원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주인에게 이사 사실을 통보하며
동네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보니, 아직 서울의 전셋값은 '진정'이라는 말이 무색해 보였다. 내가 서울의
끝자락에서 도심으로 나와 사는 겨우 2년 동안, 내 집의 전세 시세는 25% 정도 올랐고, 내가 세를 산
도심의 전세 시세는 45% 정도 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옛 집으로 돌아가 사는 것만으로 나는 큰 돈을
비축하며 살 수 있는 셈이 됐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폭등세라 하겠다.

안온하게 말하자면, 7년 전에 무거운 은행빚을 짊어지고 집을 산 일이 잘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때의 안온함은 사실은 철없음이고, 이웃을 살필 줄 모르는 아둔함이며, 그이상
제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야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벌이가 고만고만한 데 머물러
있는 동안, 부동산 가격만 뾰족한 각도로 튀어오르면서 집없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점점 더 강퍅한
데로 몰아넣어 왔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이 땅에서 세를 얻어 산다는 것은 참 지독한 일이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2년간의 자기 월급을 모두 저축했어도 전셋값이 올라간 만큼을 충당하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지키는 일은 집 없는 이들에게 참담한 수모를 요구했다.

김종철 선생과 김규항 선생의 글을 종종 읽는다. 생활을 닮고 싶고(김종철), 지조를 닮고 싶은(김규항)
그들의 글은 결국 내 삶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담론이 비슷하나 각론이 다른 이 둘이
우리 삶에 요구하는 것은 같다. '자발적 가난'이다. 그들의 판단은 지금의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신이
풍요롭게 살면서도 영성을 간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미친다.
나 역시, 그저 자본의 마름으로 생활하면서 그때그때 비판적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더불어 행복해지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저 둘에게, 맹렬히 동의한다.

지난 몇 년 간, 읽고 공부하고 생각한 것들은 저 둘이 말한 것들의 자장(磁場) 속에 있었다. 기부금을 내고
식단을 유기농으로 바꾸고, 쓰레기 자체를 줄이며, 벌이를 나누고, '착한' 여행을 다니고, 색다른 착상의
책을 낸 것도 그들이 권하고 내가 받아안은 것 너머의 일종의 '자가발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쯤 더 가벼워지고 단촐해졌으며, 그만큼 더 행복해졌다. 적어도 나는 이제 누군가의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망설임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즈음에 와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건 엄청난 변화다. 나는 삼십년 간, 늘 괴로워하며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비관'은 한번도 변주된 적 없는
내 삶의 주조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렇게 삶을 바꿔가는 동안에도 한쪽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가난이 두려웠던 것이다.
줄어든 소비의 대부분을 저축으로 돌렸으며, 끊임없이 경제 동향을 살폈다. 내가 궁극적으로 손해입지 않도록
여러가지 지표에 늘 촉각을 곤두세웠다. 삶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할 꿈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 과정에서
남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자발적 가난'하고는
여전히 거리가 먼 셈이다. 김종철, 김규항 선생은 내 머리 속의 스승이지 내 마음 속의 스승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비교적 어려운 점 없이 살아왔다. 부모님은 그저 시장 어귀에서 가게를 하는 평범한
서민이었지만 그분들은 자식에게 뭐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먹이고 사주며 입히고는 자신을 희생해 왔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오히려 우리 집이 잘 산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어쩌다 내가 특목고에 입학하면서
'진짜' 중산층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때껏 조그만한 동네, 고만고만한 가겟집 형편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왔다. 더구나 사춘기 시절, 무엇때문이었는지는 지금까지 여쭤보지 않았으나 집이
한순간에 기울었던 때를 겪으면서 나는 내 자신과 부모님과 집과 생활을 오랫동안 부끄러워 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똑똑히 기억한다. 문도 없던 집에서 살았던 한 때, 담도 없이 벽 바깥이 바로
길이었던 그 때를. 말 못할 여러 일들이 겹쳐 내 삶은, 또한 부모님의 삶 역시 참 암담했었다. 사정은
그 후 좀 나아졌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생활습관 일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치를 범죄시하는
내 생각은 신념에서가 아니라 그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삶을 위해, 그리고 먼저 행동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이 땅과 세계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사실 명확해 보인다.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만이 내 생각과 마음과 삶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눈독 들이곤 하는 괜찮은 포도주도 포기해야 할 것이고
좋은 카메라에 대한 욕심이나, 잘 없앴다고 스스로 칭찬했던 자동차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할 것이다.
초대형 상점을 구경다니는 일에 대한 취향도, 술값을 호기롭게 지불하는 '기분파'의 버릇도 없애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바늘 구멍 앞의 낙타인 것. 비우고 덜고 맑혀야 할 시간이 한참 더 내 앞에 남아있다.

요즘 내가 집과 도서관에서 열심히 빠져들고 있는 저자는 산문가로서의 김용택이다. 시집이 아닌
그의 책들을 거의 빠짐없이 읽는다. 군더더기 없는 生. 어떻게 하면 나는 내 방식대로,
그가 풍기는 즐거움을 체득할 수 있을까.풍요롭지 않으면서 유쾌하게 검소할 수 있을까.
자연에 속하면서 도시를 부러워하지 않게 될까. 남의 삶을 질투하지 않게 될까.
가난이 언제쯤 간난(艱難), 그러니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게 될까.
한 발 한 발 계속 가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확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지금의 내 가장 큰 '간난'은, 그러니까 가난이 아닌 '간난'은 손으로 풍요를 놓지 않으면서도
머리로 가난해지려고 하는 데서 절뚝인다. 이번에 건너 온 삶으로 계속 가기 위해 서울을 읽고 쓰고
공부하고 걷고 살펴보는 1년 동안 나는 내 이율배반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헤쳐 볼 것이다.
그때쯤, 내 간난이 바닥을 보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살자. 삶이 그 안에서 다시 제 길을 낼 것이니.






2010/05/29 14:26 2010/05/29 14:26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창동 자락에서 NGO 간사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고급 대저택들이
모여있는 올림피아 호텔 건너편의 동네 말이다. 아침에 복작거리는 버스를 타고 북악터널을 지나
서울예술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30분쯤 언덕을 올라가면 3층 대형 양옥집을
개조한 사무실 건물이 나왔다. 그곳은 우리 말고도 여러 단체가 사무실로 빌려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평창동이란 특성상, 그리고 주택가에 자리잡은 사무실이라는 특성상 대체로 연구작업 같은
정적인 사업들을 주로 진행하는 NGO들이 선호하는 곳이었다. 매시 정각과 30분마다 운행하는
마을 버스가 1대 있긴 했으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걷겠냐 싶어 나는 매일 아침마다
가파른 길목을 씩씩하게 걸어올랐다. 사무실에 가장 일찍 출근해 식당과 Bar, 세미나실을 겸한
1층 회랑의 통창 앞에 앉아 산그늘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는 일은 그 분주한 시간 속에서도
늘 뭉클한 행복이었다.

시민단체 생활은 일반 회사와는 다른 점이 많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점심 식사였다. 당번을 정해
매일 밥과 국을 식당에서 해먹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고, 설거지를 해야하는 까닭에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동료들과 새로 밥을 지어먹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반찬까지 할 손재주들은 없어서, 보름에 한 번 쯤은 근처 시장에서 반찬 거리를 서너가지
사들고 오는 것도 소꿉놀이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나이 많은 동료 하나는 우거지 된장국을 아주
맛깔지게 끓여서 그가 당번인 날을 기다린 적도 있었고, 선배 하나는 손속이 형편없고 간을 잘 못 보는
통에 그가 식사를 맡을 때면 누군가 이상하게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그보다 먼저 식당에 가서
라면을 끓여놓곤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민단체가 일반회사와 다른 점 가운데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세미나였다. 좋은 강사를 초빙해
회원들과 함께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자리를 한달에 2번은 마련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신참이어서 주로 전화로 회원들에게 강연 내용을 알리고 참석을 부탁하는 일이 주 업무 중
하나였는데, 하루에 몇 십 명에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참석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은
꽤 고된 노동이었다. 게다가 세미나가 끝나면 뒤풀이까지 있곤 해서 그런 날은 아주 늦게
끝나기 때문에 이번주 금요일에 세미나가 잡혔다 하면 주초 월요일부터 뒤꼭지가 무거워지곤
했다. 그래도 세미나에 강연을 하러 와주시는 강사들의 면면이 아주 훌륭했고, 강연 내용도
속깊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들은 벅찬 감격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언제나 NGO들은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땅에서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시민사회단체는 내가 알기로는 딱 두 곳 뿐이다. 참여연대와 함께 하는 시민행동. 나머지는
모두 공공 사업을 따내거나 연구 용역 등을 소화하면서 간신히 단체를 꾸려간다.
활동가들은 다들 어려운 주머니 사정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사업과 생활을 만들어 낸다.
그때 우리 단체도 '거버넌스'라는 사회적 협약 연구과제를 운영하고 지원금을 받아
사업을 지속해 나가곤 했다. 들어간지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이
제 때 안 나올 거라고 해서 당혹했던 기억도 난다. 돈이 없어서 반찬 사는 것을 미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아예 우파 단체가 아닌 한 정부 지원 자체가 막혔기 때문에 내가 일했을 때보다
사정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작년에 제주도에서 원고를 쓸 때 만났던 한 NGO 간사는
정말 재정상황이 열악하다며 술자리에서 긴 한숨을 토했던 적이 있다.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기자를 그만 둔 친구와 얼마 전 술을 마셨다. 그는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다녔던 신문사가 이 땅의 거의 유일한 양심 언론이었고, 그가 이때껏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는 아니더라도 대략은 알고 있는 터라 '로스쿨'과 그의 모습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마포의 막걸리 집에서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연유를 물었는데
그는 변호사가 되어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은 게 꿈이라고 약간 수줍은 얼굴로 털어놓는
것이었다. 내가 이 나이(그도 벌써 서른 일곱이다) 되어서 돈 벌려고 로스쿨에 다니겠냐고.
자신이 경제부 기자를 거쳤으니 산업 담당 변호사로서 노동조건과 불법적 기업활동을
감시하는 일이 경력을 살리는 길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매일 폐관할 때까지
형광등 불빛 아래 눈이 침침해지도록 책을 파는 게 일상이었을텐데도,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바램과 속내를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고 따스해 보였다. 그건 취기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은 어렵다. 아니, 인생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먹고 살려고' 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허용하면서
타인과 공공성에 무감각해지면서 생활하는 것이 우리들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본의 조건은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기준을 자꾸만 최저치로, 그 최저치마저도 계속 갱신하면서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대로 만들어진다. 그 삶의 기준들을 세상의 평균적 경제관념이나
남이 만들어놓은 조건 혹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 삶을 살음으로서
남의 삶도 아울러 보살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살아 움직이는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그 촛불들이 다시 광장을, 이 땅을 훤하게 밝히는 날, 세상은 한 발 짝 더 진보할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의 건투를 빈다. 그의 인생을 응원한다. 당신은 내 친구고
그리고 때로 준엄한 스승이기도 하다. 삶도 살 만하다. 네가 있으니까. 네가 힘이 되니까.
네게서 책이 줄 수 없는 배움을 얻으니까. 이 고마움을 돌려주고 싶다. 네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게 빚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일테니.

명랑(明朗)은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는 뜻이라지. L군. 명랑하기를. 지금처럼 대책없이, 한결같이.
네 빛이 전염되어 너와 나 그리하여 모두가 더불어 빛을 내도록. 선동처럼, 도화선처럼, 꽃소식처럼 그렇게.
2010/04/13 23:57 2010/04/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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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from 생을 말하기, 산문 2010/03/04 11:15


늘 지나치는 지하철역 출입구 바로 옆에, 자그마한, 아니 자그마하다 못해 옛 시절 동네에 한둘 쯤은 있었던 작은 반원 구멍으로 담배를 팔고 돈을 건네받던 구멍가게같은, 배좁은 김밥집이 있다. '김밥천국' 처럼 수많은 일반 김밥집들도 이제 한 줄에 천삼백원에서 천오백원씩은 받는 요즘에도 꿋꿋이 천원 한 장에 김밥 한 줄을 말아내는 그 집을 지키는 사람은 50대의 아주머니 한 분이다. 아침에는 토스트와 말아놓은 김밥을 팔고, 점심과 저녁에는 호떡과 바로 말아주는 김밥을 내는 그 집에는 간판도 없고 서서 먹을만한 작은 카운터도 없다. 포장을 걷으면 영업중인 것이고, 포장을 내리면 문을 닫은 것이다. 저녁을 못 먹고 뒤늦게 퇴근하는 밤이면, 나는 종종 그 집에 들러 김밥을 한두 줄 싸 가곤 한다. 분식집의 라면도 삼천원 정도는 받는 지금, 싼 값에 허기를 채우기에는 그 집 김밥 만한 것이 없기에, 맛도 그럭저럭 괜찮은 까닭에.

작년 늦여름 즈음, 아직 해가 남아있던 저녁,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다가 그 집을 흘깃 보게 됐다.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그 좁은 가게 '안'에 들어서 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 옹색한 공간에서도 그들과 가장 대각선에 해당하는 구석에 몰려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집을 계속 관찰했다. 아주머니는 손님이 아무리 많더라도 가게 안에 사람을 들여놓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손님'이 아닐 것이었다. 5분쯤 지켜보자, 상황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집달리였다. 아마 사채였을 빚을 아주머니가 제대로 갚지 못하자, 위협을 겸해 경고하러 가게에 들른 것 같았다. 그들이 집기를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맞먹을 정도로 아주머니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30분쯤 머물렀고, 아주머니가 이달 안에 빚을 갚겠다는 각서, 실제로는 연습장 찢은 종이에 벌벌 떨린 글씨 몇 줄을 써주자 서둘러 돌아갔다. 나도 그들이 돌아간 뒤에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계절에 따른 환한 저녁은 그날따라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왜 그 MBC에서 하는 고발 프로그램, '불만제로'가 일부 김밥집이 수지를 맞추기 위해 김밥에 들어가는 계란을 깨진 계란, 파손란을 사용한다는 보도가 있기 전에 말이다. 바로 그 집이 그랬다. 신문지 몇 개로 얼기설기 감춰둔 계란판에는 가끔씩 터진 계란들의 노른자가 드러나곤 했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맨 위쪽의 계란일수록 성한 계란들로 채워놓곤 했었는데, 도매상이 계란을 가져다주는 어떤 오후이면 어쩔 수 없이 깨진 계란이 그대로 외부에 노출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없어서인지, 보도 때문인지 아주머니의 김밥집은 점점 손님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불결할 뿐만 아니라 식중독도 일으킬 수 있다는 보도를 본 이후로, 나도 그 김밥집에 한동안 가지 않았다. 포장은 올려져 있었지만 아주머니가 멍하니 가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집달리가 찾아온 것을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그 이후 아주머니가 가게를 일찍 닫는 적은 없었다. 손님은 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늘 같은 시각에 가게를 열고 닫았다. '매운 김밥'이라는 새 메뉴를 내놓았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은 듯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나는 다시 그 가게에 들렀다. 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좀 더 많이 김밥을 샀다. 나는 늘 '그냥 김밥'을 주문했는데, 그러면 아주머니는 꼭 물어보곤 했다. "매운 거 한번 먹어보지 않을래요? 재료는 똑같이 들어가고, 매운 거는 양념이 추가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네, 아주머니.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처음 먹어본 아주머니의 매운 김밥은 정말 꽤 매웠다. 청양고추나 태국 고추로 매운 맛을 가미한 것 같았다.

앞으로 3개월 정도면 나는 지금 사는 곳에서 이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으니 그렇게 될 게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리모델링 얘기가 있고, 이 지역 전체가 아주 오래된 달동네에 가깝다 보니 개발의 요구가 높은 편이다. 동네의 수많은 가게들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상품이나 음식들을 싸게 내놓는다. 술집에서는 배를 채울 수 있는 술안주도 2천원이면 시킬 수 있고 허름한 주점에서는 가끔 잔술을 팔기도 한다. 1천원에 수북히 담아주는 흙당근 같은 것들도 그 품질과 상관없이 양에 놀랄 때가 많다. 이 풍경들도 몇 년 안에 사라지겠지. 아파트가 추가로 덮이고, 상가들이 번질거리는 불빛을 뿜으며 세련된 가게의 간판을 밝힐 때 늙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조금씩 떠밀려 간다. 개발의 풍경은 가난을 소멸하지 않고 그저 이동시킬 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수록 현실을 은폐하는 데 사용된다. 그럴 때 가난은 진짜 참혹이 된다.

작고 헐한 가게, 깨어진 계란도 쓰는 가게, 좋은 재료로 훌륭한 한 끼를 내놓지 않지만 가장 싼 값에 자기 삶을 파는 가게. 나는 그 집을 긍정하는 지도 모른다. 반찬 재활용이든 파손란이든 뭐라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 반대로 제대로 된 재료에 훌륭한 기술을 덧붙이고 정성을 쏟은 식당들에도 이 세상은 합당한 가격을 치르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무조건 싼 것, 노동을 착취하는 가격파괴만이 지금 세상의 善이다. 나는 한 번도 그 집의 김밥을 먹고 탈이 난 적이 없고, 아주머니의 안쓰럽지만 성실한 노동에, 그리고 아슬아슬하게밖에 꾸릴 수 없는 살림에 비릿한 공감을 느끼곤 한다. 세상엔 집이 넘쳐나지만 떠밀린 사람들이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방 한 칸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김밥집은 오래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이 김밥집이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면 안되는가? 더 나아가서, 이 김밥집에 가격을 좀 더 지불하고, 더 좋은 재료를 쓰도록, 아주머니가 집달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도록, 선순환을 일으킬 수 없을까.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은 이미 지진이 휩쓴 재난 지역에 기부금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곧 재난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전에 위험을 막고 현재를 튼튼하도록 보듬어주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어떻게든 경쟁을 이겨 부동산이나 잔고를 쌓아 미래의 불안에서 스스로를 구하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이, 오히려 이 짐승같은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이렇게 나이든 사람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떠밀고 있는 게 아닐까.

저녁 여덟 시, 아주머니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팔다 남은 김밥재료를 섞어 전날과 똑같은 간단한 비빔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느릿느릿 식사를 마칠 동안에도 손님 한 명 찾아들지 않았다. 주섬주섬 가게를 정리하고 포장을 내린다. 김밥집의 불빛이 꺼진다. 그것은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을까.







2010/03/04 11:15 2010/03/04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