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우'에 해당되는 글 2건

  1. [펌]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 2010/07/12
  2. 강종우 선생의 일요일 편지 (2) 2010/07/05

어제 배달된 제주참여환경연대 <강종우의 일요일 편지> 입니다.
이번엔 내용이 좀 길긴 하지만 읽고 나니 사무치는 데가 적지 않네요.
참고하시라고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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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우의 일요일 편지23]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어제 아침, 여느 때처럼 신문을 뒤척이다 우연히 책 광고 한켠에 작은 제목 하나가 제 눈길을 붙잡습니다.‘시애틀 추장 연설문’. 인디언 추장이 던지는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가슴에 저미어 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 문장씩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만한, 퍽 감동적인 글입니다.

 1854년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땅을 팔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안 팔겠다고 한다면 내쫓기거나 죽임을 당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 두아미쉬-수쿠아미쉬 지역에 살았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 시애틀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보냈던 게, 다름 아닌 이 연설문입니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한 나머지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불렀답니다. 태평양 연안 미국 서부 지역 맨 위에 위치한, 워싱턴 주의 주도(州都)인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시애틀’입니다.

 시애틀 추장 연설문은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고문서비밀해제'로 12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녹색평론>을 통해 처음 알려졌습니다. 올 초 열반에 드신 법정스님을 비롯해서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요즘엔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그래도 그 메시지만는 오롯이 전해집니다.  

 어쩌면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이 너무 감상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답고 놀라운 통찰력 안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인디언 특유의 직관과 자연으로부터 터득한 깊이 있는 성찰이 마디마디 배어납니다. 오름 혹은 곶자왈을 찾아 나서거나, 올레나 사려니 숲길을 걸으면서 한 번이라도 제주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겁니다. 너무 길어 조금 지루할지 모르지만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길 권하면서 전문을 소개합니다. 물론 저도 그럴 작정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영화 '아바타'도 한 번 다시 보시고요.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 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 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 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건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 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 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연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 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제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그대들은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연어 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인지 모른다. 당신들 백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 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I see you'
영화‘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판도라행성의 나비족 네이티리에게 외친 말입니다.

판도라행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곳입니다.
작은 풀들에서부터 나무들, 동물들, 원주민인 나비족까지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에너지를 느끼고 그 에너지 속에서 교감하며 소통합니다.
자신들의 머리카락에 붙은 말단신경을 통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소통하는 나비족.
말의 역할을 하는 동물, 전사를 태우고 공중을 나는 새, 자신들이 신으로 모시는 영험한 나무,
그리고 그 나무를 통해 자연전체와 소통합니다.
인간은 그 생명체의 일부분인 광물에만 관심이 있지만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팔거나, 파괴할 수 없는,
함께 소통하며 어우러져 살아야하는 공동체로 인식합니다.   

시애틀 추장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영화 아바타에서 본 판도라행성이 겹쳐집니다.
오늘 저는 그 영화에 다시금 빠져들 것 같습니다.  
 
 

 2010년 7월 11일 점심무렵, 사무실에서
강종우
kjowoo1216@한메일닷넷


 

2010/07/12 11:06 2010/07/12 11:06


제가 회원으로 속한 '제주참여환경연대'는 제주의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영리병원, 해군기지, 케이블카 등등 지역적, 탈지역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섬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단체지요. 일일이 꼽을 수 없을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중에서 이렇게 매주 일요일마다 메일 한 통을 보내주는 것도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참 좋은 메일이어서... 일요일이 기다려질 때가 많습니다.

섬에 살게 되면, 저도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제 시간과 노동을 다른 이들과 나눠 쓸 거에요.

메일을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은 http://www.jejungo.net/(제주참여환경연대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 하시고, 메일링 수신에 체크하시면 됩니다.

한번 읽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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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우의 일요일 편지22]
지역경제의 생태적 순환1, 스위스에서 배운다!

가난하고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스위스 

  오늘, 유럽의 작은 나라 스위스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괴물의 탄생>의 저자 우석훈이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영감을 얻었다고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제주가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 때문이기도 합니다.

 승자독식의 토건국가,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일반 경제학으로는 해독 불가능한 한국경제. 그래서 모두를 개미지옥으로 몰아넣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오늘날 한국경제에 우석훈은 ‘괴물’이란 딱지를 붙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분열증에 걸린 ‘괴물’을 해체시킬 해답을,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스위스에서 찾습니다. 책거리 겸해서 제 나름 재구성해 올립니다.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대단히 비슷합니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나 에너지 자원 따위가 거의 없다는 점도, 또 국토의 70% 정도가 산이라서 ‘있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한국 교과서와 스위스 교과서의 첫 머리부터 그렇습니다. 한 때 유럽에서 스위스라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우리네 보릿고개처럼 겨울이면 산악지역 사람들이 19세기까지도 굶어죽었고, 배가 너무 고파서 아버지들이 다른 나라의 용병이 되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던 슬픈 나라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프랑스 왕 옆에서 도망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전멸당한 군인들은 식구들에게 봉급을 보내야 했던 스위스 용병들, 세익스피어 햄릿에도 나오는 바로 그 ‘Switzers’랍니다.

 또한 한국의 지역감정 문제가 아무리 심하다고 한들, 아예 쓰는 언어조차 다른 스위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스위스의 공용어는 4개. 북부는 독일어를, 서부는 프랑스어를, 남부는 이탈리아어를 쓰고, 알프스 한가운데는 - 이제는 화석 민족이 되어버린 원래 스위스 민족의 언어 - 헬베티카어를 씁니다. 사실상 한국의 지역감정에 비하면 스위스는 훨씬 구조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이 나라는 덴마크처럼 완전히 농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이 6개월이나 되는 스위스는 4개월 정도인 한국에 비해 농업 조건이 훨씬 불리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알프스 관광 덕분에 먹고 사는 나라일까요? 유럽 국가들의 평균적 관광소득에 비쳐볼 때 스위스가 특별히 더 높지는 않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세계의 온갖 검은 돈들이 몰려온다는 비밀계좌나 운용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까요? 스위스의 금융 부문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정도로 약간 높기는 한데, 이게 엄청나게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스위스의 비밀계좌는 이미 정책적으로 폐지된 상태입니다.
 
  농업과 식품안전의 결합을 통한 생태적 전환

  1950년대까지 그저 독일이나 프랑스의 ‘위성경제’ 정도로 간주되었던 스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웨덴과 더불어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스위스 하면 잘사는 나라, 이렇게 된 건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원래 잘 살았잖아”라고 얘기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나라. 언어가 전혀 다른 세 지역의 협력위에 서 있는 국가. 이런 스위스가 경제를 개방하고, 그 개방의 힘으로 안정적이고 인간적인 지금의 번영을 이뤄낸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평화외교를 모토로 고립주의 정책을 택하면서 UN에도 2002년에야 가입했습니다. EU에는 아직 가입도 안했고, FTA는 국민투표로 사실상 부결해버렸습니다.

 스위스 경제를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협동조합. 재작년 8월, 스위스의 유통시장에는 큰 이변이 생겼습니다. 세계 2위의 글로벌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스위스에서 철수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데 까르푸를 인수한 업체는 놀랍게도 민간대기업이 아닌 협동조합. 스위스는 지역 밀착형 협동조합을 통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난해 스위스 생활협동조합 미그로스는 2백만 조합원을 달성했습니다. 인구 8백만인 나라에서 전 국민의 26.6%가 협동조합 조합원이라는 말입니다. 스위스에선 미그로스가 제공하는 몇 가지 서비스 없이 살아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미그로스 체인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미그로스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음식, 금융, 레저, 문화, 휘발유와 난방용 연료, 가구, 스포츠 용품, DIY 상품, 전화서비스, 휘트니스 클럽, 어학강좌까지 폭 넓습니다.

  또한 어느 지역에서든 가게가 협동조합에 가입하면 지역주민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대형할인매장이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가게나 소형 매장을 온통 잡아먹어버린 우리와는 정반대. 일반 슈퍼나 가게 어디에서든 밀가루나 쇠고기 혹은 유제품을 고르더라도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안전한 식품과 식재료를 살 수 있는, 이른바 농업과 식품안전의 결합을 통한 생태적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사회가 다름 아닌 스위스입니다. 한국에선 광우병과 유전자 조작식품이 싸기도 할뿐더러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거기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농업을 살려내고 이로써 국민들의 식품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그런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가 알프스에 스키장과 산악철도를 엄청나게 만들어 관광으로만 먹고산다는 건 오해입니다. 최근 스위스는 관광산업이 국민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알프스의 생태복원을 이웃 국가들과 국가 간 협약방식으로 추진 중입니다. 국토의 생태적 복원을 통해서 건설 산업을 새롭게 복원기술 쪽으로 전환하는 중입니다. 건설을 안 하면 건설사가 망하지 않을까 싶지만, 복원이 건설만큼 큰 산업으로 부각될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 …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

  스위스는 실업률이 2% 정도이지만, 마찰적 실업을 제외하면 대체로 완전고용에 가깝고, 무엇보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 거의 없는 사회입니다. 누구든지 한 가지 일만 제대로 하면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는 해방되고, 아이와 가난한 사람은 국가의 일도 아니고, 주정부로 정의할 수 있는 칸톤(Canton)의 일도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일입니다. 사치하는 사람도 없지만, 일하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지역의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줍니다. 세련된(?) 우리들 시선으로 보면 답답하고 멋지지도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지만, 스위스에서는 누구나 먹고 입고 교육 받는 데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스위스의 대학등록금은 우리 돈으로 연간 50만원 정도. 대학진학률도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 비율이 18-20%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80% 가까운 대학진학률을 보이는데, 기계적으로 비교하면 한국의 대졸자들이 스위스의 고졸자들에 비해 절반의 생산성도 올리지 못하는 셈입니다. 평생 같은 일을 하면서 사회적 마에스트로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 고졸자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위스제 ‘맥가이버 칼’, 밀리터리 시계, ‘에망탈’ 같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거나, 1억 원에 가까운 가격의 엠프와 스피커를 만드는 골드문트사의 기술자들입니다. 그리고 세계 5위권 내에 들어가는 스위스 연방은행의 은행가들도 상당수는 고졸자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일부이지만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

“제가 만났던 취리히 공과대학의 한 전문사서가, 자신의 두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일 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방식을 계속하겠다고 하더란 거지요. 7일 가운데 2일만 일한다고! 정규직인 그녀는 임금 수준의 1/3 정도를 포기하는 대신 일주일에 닷새를 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남편의 월급과 합치면 그런대로 살 만하고, 그 대신 습관적으로 카페에서 마시던 에스프레소만 좀 줄이면 된다는 식이더군요.”

 전문직과 문화계를 중심으로 그런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스위스에서는 늘어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일주일에 이틀 노는 사람’들이 생기면 노동시간이 줄어서 큰일 난다고 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기에는 반복해서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노동시간을 늘리는 전략이 유효하지만, 지식경제를 축으로 하는 오늘날은 다른 생각과 다른 발상 자체가 경제의 중심축이 되는 세상입니다. 불행하게도 지식경제에서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이틀 노는 사람’이 경쟁하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이틀 일하는 사람이 이길 겁니다. 문화적 풍성함과 많은 독서, 그리고 여유로움 속에서 나오는 발상의 전환을, 일중독이 아니면 밀려나서 죽는다며 기계적으로 왔다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스위스에서 배우자!

  이렇게 본다면, 한국은 죽어라 일해도 절대 스위스를 이길 수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 있는 셈입니다. 지식 투입을 늘리고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쉬는 시간을 늘려주고, 그 대신 창조능력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데, 한국은 집값과 사교육비를 더 올리고,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를 억지로 높이는 방식으로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에너지와 자원을 계속 투입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자원외교에 매달리며, 국내 정책 기반과 공공성 기반을 없애는 FTA 중심의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있는 우리의 앞날을 생각하면 솔직히 암울해 집니다.

 한 마디로 스위스의 국민경제 운용방식과 사회적 삶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식품을 중심으로 농업의 재발견이 이뤄지는 사회이고, 노동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사회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대안 경제를 향한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찌 보면 여러모로 상당히 비슷한 한국과 스위스지만, 지난 5년간은 가장 극단적으로 다른 경제구조와 경제적 성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두 가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직접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자치에 근거한 분산적 구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진 제3부문의 존재입니다. 이곳에선 실업자가 되거나, 아프거나, 여하튼 뭔가 불편한 게 있을 경우, 시청에다 말하면 지역공동체에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 네슬레와 같은 대기업도 있고, 공공부문을 장악하고 케인즈형 복지국가를 추진하는 정부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스위스에는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자치의 힘으로 일궈낸 협동조합 같은 제3부문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지역경제의 생태적 전환... 우리가 스위스에서 배워야 할 건 바로 이게 아닐까요? 생명과 평화가 만난다면, 그건 바로 스위스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쪽에선 전쟁을 머리에 두면서 국가 안에서 생명을 얘기한다는 건 모순입니다. 그 모순을 극복한 거의 유일한 국가가 스위스입니다. 직접 민주주의와 지역 공동체를 강화시키면서 생태적 전환이 평화와 만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성이 꽃필 수 있는 그런 변화를 생각한다면 그건 스위스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제주는...

  해마다 여러 기관에서 ‘삶의 질’이란 걸 조사하는데, 보통은 스위스의 취리히와 로잔이 번갈아 가면서 1, 2등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삶의 질’과 같은 고상한 단어가 아니라, 고통지수 혹은 신경성질환발생률 같은 것으로 ‘삶의 고통’을 짚어보기에 훨씬 알맞습니다. 일을 많이 시켜도 좋으니 일할 자리라도 달라고 절규하는,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점차 괴로워지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취리히나 로잔이 서울과 다른 점은 지역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면서 비대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지역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 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을 개미지옥으로 정의한다면, 서울과 모든 게 정반대인 곳이 바로 취리히입니다. 취리히의 모든 게 정확하게 서울과 정반대라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제주대 송재호 교수가 ‘녹색성장과 제주의 선택’이란 강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제주는 쉽게 말하면 서울하고 반대로 가면 됩니다. 제주에 관광 오는 사람들은 다 서울과 같은 도시 사람이지요. 제주가 서울과 똑같으면 오지 않아요. 그러나 제주를 서울과 반대로 만들어 놓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7월 첫째 주 토요일, 바로 어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협동조합의 가치와 역할을 널리 알리는
‘국제협동조합의 날’입니다.

생명과 평화가 깃들고, 나눔과 보살핌이 넘쳐나는
‘모두를 위한 제주’를 꿈꾸어 봅니다.
협동적 자치 ‘수눌음’과 생태적 순환경제 ‘돗통시’
창조적 복원이 필요합니다.

하루하루 발걸음은 더딘데, 언제나 마음만 앞서 갑니다.
‘여럿이함께’하면 길은 등 뒤에 보입니다.
 
 2010년 7월 4일 아침에, 연동 집에서
강종우

2010/07/05 07:56 2010/07/05 0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