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창동 자락에서 NGO 간사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고급 대저택들이
모여있는 올림피아 호텔 건너편의 동네 말이다. 아침에 복작거리는 버스를 타고 북악터널을 지나
서울예술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30분쯤 언덕을 올라가면 3층 대형 양옥집을
개조한 사무실 건물이 나왔다. 그곳은 우리 말고도 여러 단체가 사무실로 빌려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평창동이란 특성상, 그리고 주택가에 자리잡은 사무실이라는 특성상 대체로 연구작업 같은
정적인 사업들을 주로 진행하는 NGO들이 선호하는 곳이었다. 매시 정각과 30분마다 운행하는
마을 버스가 1대 있긴 했으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걷겠냐 싶어 나는 매일 아침마다
가파른 길목을 씩씩하게 걸어올랐다. 사무실에 가장 일찍 출근해 식당과 Bar, 세미나실을 겸한
1층 회랑의 통창 앞에 앉아 산그늘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는 일은 그 분주한 시간 속에서도
늘 뭉클한 행복이었다.
시민단체 생활은 일반 회사와는 다른 점이 많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점심 식사였다. 당번을 정해
매일 밥과 국을 식당에서 해먹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고, 설거지를 해야하는 까닭에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동료들과 새로 밥을 지어먹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반찬까지 할 손재주들은 없어서, 보름에 한 번 쯤은 근처 시장에서 반찬 거리를 서너가지
사들고 오는 것도 소꿉놀이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나이 많은 동료 하나는 우거지 된장국을 아주
맛깔지게 끓여서 그가 당번인 날을 기다린 적도 있었고, 선배 하나는 손속이 형편없고 간을 잘 못 보는
통에 그가 식사를 맡을 때면 누군가 이상하게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그보다 먼저 식당에 가서
라면을 끓여놓곤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민단체가 일반회사와 다른 점 가운데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세미나였다. 좋은 강사를 초빙해
회원들과 함께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자리를 한달에 2번은 마련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신참이어서 주로 전화로 회원들에게 강연 내용을 알리고 참석을 부탁하는 일이 주 업무 중
하나였는데, 하루에 몇 십 명에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참석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은
꽤 고된 노동이었다. 게다가 세미나가 끝나면 뒤풀이까지 있곤 해서 그런 날은 아주 늦게
끝나기 때문에 이번주 금요일에 세미나가 잡혔다 하면 주초 월요일부터 뒤꼭지가 무거워지곤
했다. 그래도 세미나에 강연을 하러 와주시는 강사들의 면면이 아주 훌륭했고, 강연 내용도
속깊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들은 벅찬 감격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언제나 NGO들은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땅에서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시민사회단체는 내가 알기로는 딱 두 곳 뿐이다. 참여연대와 함께 하는 시민행동. 나머지는
모두 공공 사업을 따내거나 연구 용역 등을 소화하면서 간신히 단체를 꾸려간다.
활동가들은 다들 어려운 주머니 사정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사업과 생활을 만들어 낸다.
그때 우리 단체도 '거버넌스'라는 사회적 협약 연구과제를 운영하고 지원금을 받아
사업을 지속해 나가곤 했다. 들어간지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이
제 때 안 나올 거라고 해서 당혹했던 기억도 난다. 돈이 없어서 반찬 사는 것을 미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아예 우파 단체가 아닌 한 정부 지원 자체가 막혔기 때문에 내가 일했을 때보다
사정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작년에 제주도에서 원고를 쓸 때 만났던 한 NGO 간사는
정말 재정상황이 열악하다며 술자리에서 긴 한숨을 토했던 적이 있다.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기자를 그만 둔 친구와 얼마 전 술을 마셨다. 그는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다녔던 신문사가 이 땅의 거의 유일한 양심 언론이었고, 그가 이때껏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는 아니더라도 대략은 알고 있는 터라 '로스쿨'과 그의 모습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마포의 막걸리 집에서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연유를 물었는데
그는 변호사가 되어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은 게 꿈이라고 약간 수줍은 얼굴로 털어놓는
것이었다. 내가 이 나이(그도 벌써 서른 일곱이다) 되어서 돈 벌려고 로스쿨에 다니겠냐고.
자신이 경제부 기자를 거쳤으니 산업 담당 변호사로서 노동조건과 불법적 기업활동을
감시하는 일이 경력을 살리는 길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매일 폐관할 때까지
형광등 불빛 아래 눈이 침침해지도록 책을 파는 게 일상이었을텐데도,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바램과 속내를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고 따스해 보였다. 그건 취기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은 어렵다. 아니, 인생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먹고 살려고' 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허용하면서
타인과 공공성에 무감각해지면서 생활하는 것이 우리들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본의 조건은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기준을 자꾸만 최저치로, 그 최저치마저도 계속 갱신하면서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대로 만들어진다. 그 삶의 기준들을 세상의 평균적 경제관념이나
남이 만들어놓은 조건 혹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 삶을 살음으로서
남의 삶도 아울러 보살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살아 움직이는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그 촛불들이 다시 광장을, 이 땅을 훤하게 밝히는 날, 세상은 한 발 짝 더 진보할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의 건투를 빈다. 그의 인생을 응원한다. 당신은 내 친구고
그리고 때로 준엄한 스승이기도 하다. 삶도 살 만하다. 네가 있으니까. 네가 힘이 되니까.
네게서 책이 줄 수 없는 배움을 얻으니까. 이 고마움을 돌려주고 싶다. 네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게 빚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일테니.
명랑(明朗)은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는 뜻이라지. L군. 명랑하기를. 지금처럼 대책없이, 한결같이.
네 빛이 전염되어 너와 나 그리하여 모두가 더불어 빛을 내도록. 선동처럼, 도화선처럼, 꽃소식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