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키보드 옆에는 한 장의 티켓이 놓여져 있다. 1층 C열 176번이라 쓰여져 있으며, R석 그리고
*** 신포니에타 내한공연 이라고 적힌 손바닥만한 표 한 장이. 그렇다. 나는 클래식 공연엘 다녀왔다.
콘서트는 커녕 뮤지컬조차 한번 관람하지 않은 내가. 평생 자신을 위해 음반 3장도 사지 않은 내가.
베토벤이나 하이든은 고등학교 음악수업 때 이름을 들어본 것이 마지막인 내가 직접 비용을 지불하고
정통 클래식 연주회장에 다녀온 거다. 어쩌면 내 인생에선 '사고'에 가까운 특별한 해프닝.
여행중이라 지방에 있었는데, 연일 폭염특보가 내려 산자락이 아니면 걸어다니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한낮에는 영화관에 있던가 카페를 찾아 열을 식혔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매일 닥치는 한낮의
더위가 지겨웠다. 서울이 아니어서 독립영화관도 거의 없었고, 볼만한 영화 리스트도 바닥이 나
카페에서 음료수잔만 비우다 보니 무료하기 그지없어 검색 끝에 처음으로 클래식 공연을 고르게 된 것이다.
졸리면 자면 되겠지, 게다가 명망을 가진 국제적 신포니에타의 내한공연인데 가격도 영화값과 비슷하니까
밑져야 본전 이라는 생각이었다.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2천석이 넘는 대공연장.
무대에 쏠리듯 반원형으로 배치된 1,2층의 객석이 이채로웠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신포니에타Sinfonietta란 약간 작은 규모의 심포니를 말한다. 프로그램에서
확인한 현악기 위주의 40여명 이 동양 신포니에타는 꽤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연주될
목록은 모두 모짜르트의 것들. 제목을 읽어도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는 한심한 귀와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도 모짜르트니까 알게 모르게 그동안 내가 들었던 곡들도 있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영화나 광고 음악 등으로 이날 내가 들었던 곡들은 꽤 낯이 익었다. 고전 음악은 생각보다
우리 삶에 훨씬 더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방학 시즌이었고, 가격이 파격적일 정도로 싼 데다, 부제로 '여름 음악 수업'이란 게 붙어 있어서인지
그날 객석을 메운 2천명 중 80%는 아이들, 초등학교 3학년 정도부터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십대들이었다.
그들이나 나나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정도는 비슷할 터. 아이들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연주를
기다렸는데 과연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장내가 무척 소란했다. 연주회가 절반 쯤 지난 후부터는
집중력을 잃은 아이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해 주의를 준 적도 몇 번 있었고.
아무튼 연주는 시작되었다. 지휘자의 힘찬 손짓을 시작으로 기대보다 훨씬 낮은 음량에서부터 피어올라
부드럽고 온화하게 공연장 구석구석에 젖어들었다. 솟아오르는 호른, 종종 존재감을 비추는 큰 북,
노래하듯이 지저귀는 여러 대의 바이올린과 낮은 음으로 감정을 골라주던 첼로, 움직일 듯 흔들리는
콘트라베이스까지... 음악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30대 남자의 귀에도 또렷한
음률을 흘려넣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지만, 눈 앞에서 진심을 다해 연주되는 프로들의 공연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연주회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저 단조로운 움직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음악을 만들면서 행해질 때에는 기대한 것 이상의 흥겨움과 재미가 있었다. 앵콜마저 끝나고
객석이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물결로 분주할 때에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더 들었으면 좋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만큼.
김혜순의 시 '한 잔의 붉은 거울' 가운데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이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신포니에타의 공연도 내 안에 그렇게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연주자들의 한 무리였다가 그들 전체가
하모니를 이루며 굽이치는 음악이 되어 내게 들어왔다가 그 들어온 음악들이 내 안에서 들끓는 것 같은
아주 새로운 변이.
언젠가, 내가 열심히 노래를 들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연주회를 찾아 공연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리거나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매일매일 돌아다니는 날이. 그 모든 날이 아니 온다 해도 그날 공연을 듣는
기분과 마음은 참 그윽했다. 그 붉은 기운이 훌륭한 책을 읽고 난 다음처럼 몇일 동안 내 혈관을 돌아다니는
것 같다.
공연이 참 좋으셨나봅니다. 글도 마치 제가 공연을 막 마치고 나온듯 생생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포니에타가 유행 아닌 유행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나오거든요. 서울 오시면 뵙지요.
아직 섬에 있습니다. 처음 듣는 공연이라 그런지 감동이 훨씬 더 컸던 것같아요. IQ84는 저도 읽었는데, 음악따위는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라 기억에 남은 건 없었어요. 뭐 이제부턴 약간의 변화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곧 돌아갑니다. 가서 연락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