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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희망의 근거 (8) 2010/07/21

서울을 탐침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른 일곱 해 내 생애의 거의 모든 시절을 보내온 곳,
사랑을 배우고, 흉터를 만들었으며, 눈물도 가르쳐 준 곳. 유년의 좁은 골목길과 학교를 오가던 작지 않은 길,
회사와 회사를 누비던 크고 작은 길들, 그리고 일상에 바빠 내가 놓쳐버렸던 수많은 길들.

저는 사실 이 서울을 아주 탐탁치 않아 했지요. 거리는 더럽고, 인파는 북적대며, 늘 차가 막히고
한줌의 초록빛을 찾아내기 힘든 이 도시를 그저 욕망의 집적물, 배설의 용광로 쯤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저는 틈만 있으면 서울이 아닌 곳들로 달아나곤 했어요.
제주, 안면도, 강릉, 경주, 제천, 목포, 공주, 통영, 강진, 속초, 해남, 고성, 청평, 춘천, 전주, 제천...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늘 얼마나 답답했던지요. 어딜 가도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과 빌딩들,
지독한 상혼으로 밤에도 붉게 타오르는 서울이 참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짜 서울에서 마침내 탈출하고자 하는 중입니다.
몇 개의 후보지를 두고 집을 알아보고 있으며, 짐을 줄이고 있는 동시에, 동료를 물색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후년 쯤  주소를 옮기는 것을 목표로 그밖에도 필요한 사전 준비를 차곡차곡 해치우고 있어요.

그러던 중에 이제 제가 살던 곳, 살아왔던 지역들을 하나씩 하나씩 걸어보게 됐습니다.
북한산 자락 밑 아직 부모님이 사시는 제가 태어난 동네와 대학을 다니던 서울의 동쪽,
중간에 이사를 와 몇 년 살았던 단종과 단종비가 서로 그리워하였으며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랐던
청계천 옆 동네,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책을 읽으러 줄창 다니던 정독도서관 부근,
회사가 있던 낙원상가와 운현궁, 젊은 날 주말마다 다니던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과 덕수궁,
친척집을 왕래하느라 자주 들렀던 아현동과 이대앞...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억들을 가지고
제가 슬픔과 환희를 더불어 누렸던 곳곳을 다시금 밟아보고 있지요. 그리고 책과 자료를 찾고
지인들을 통해 서울의 오랜 기억들을,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보고 있습니다.
서울이 통털어 어떤 의미로 각인되는지, 샛길들은 흩어지고 좁아지다가 마침내 어디로 모여드는지.

저는 제가 살았던 시절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들, 배우고 싸웠으며 일하고 사랑한 이 도시가
여전히 우리가 계속 살아도 된다는, 재개발과 이윤의 총체가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되었으면 해요.
서울에 드리운 서글픈 역사, 강점기와 남북전쟁, 다시 사실상 식민지였던 멀지 않은 때와
민주주의의 싹이 새롭게 피어난 최근대를 아울러 수많은 기록들이 담겨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습니다.
때로는 한 곳을 집중조명한 저작들을 공부하고, 종종은 통사적으로 장소의 변화를 고찰한 책들도
읽고 있으며 옛 역사와 현대의 참신한 기운이 서로 맞부딪히는 혈자국들을 거닐고 있어요.
그것은 더없이 흥미로운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작업들에서 '희망의 근거'를 아직 완전한 형태로 발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끔은 오히려
다니고 공부할수록 암담해지거나 씁쓸해지는 경우도 생기는걸요.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생활을
집대성해 보자고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 언제쯤 마무리가 될는지도 기약할 수 없어요. 찾으면
찾을수록 갈 곳은 늘어나고 봐야 할 책들은 쌓여만 가지요. 그럼에도 예기치 않았던 순간,
서울이 지니고 있는, 간직해 온 독특하고 순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는 혼자 먹먹해 하기도 합니다.

네, 저는 최소한 올해는 서울을 다닐 거에요. 이 뻔한 도시, 자본의 수도, 잔인하고 폭력적인 서울을.
그 기록들이 차오르고 다시 차오르면 그리고 끝내 긍정할 수 있다면, '희망의 근거'로 판단된다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겠지요.

이 여름은 제가 잠시 서울 밖에서 서울을 생각하는 시간. 어느 곳이 안이고 어느 곳이 바깥인지
정해두지 않은 채 세상의 사면을 더듬고 짚어볼 거에요. 기대도, 실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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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독도서관 뒷편, 가회동 골목길에서 2010년 5월.








2010/07/21 18:23 2010/07/21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