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가
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
어디메 묵정밭에 떨어져서
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거든
그게 바로 너인가고 여길지니
- 박정만, <정읍별사 2> 중에서
지난주 목요일, 정읍에 다녀왔습니다. 전주와 광주 사이, 인구 9만의 크지 않은 소읍인
그곳은 시인 박정만의 고향이기도 하고, 소설가 신경숙이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게는 친한 형님의 본원으로 더 가까이 느껴지는 곳이지요.
그동안 저는 전라도의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계절에 한 번 씩은 전주에 들렀고, 몇 년 에
한 번 정도는 광주에 다녀왔으며, 친구의 흔적을 따라 익산에, 몇 년 전에는 앞서 얘기한
형님과 같이 해남엘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또, 친구들과 남도답사를 떠난 적도 있지요.
몇 번 밝힌 적이 있지만 저는 언젠가 전라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쓸 거에요.
그건 당장의 일은 아니어서 지금은 기회나 인연이 닿는 대로 가볍게 여행을 다녀오곤 합니다.
정읍은 이번이 두 번 째에요. 이전 한 번은 형님 댁에 큰 일이 있어 급하게 들른 기억이 있지만
다른 경황이 없어 인사만 드리고 온 것이라 제대로는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겠네요.
당일치기 여행으로 계획하고 떠난 이번 정읍은 오직 벚꽃을 보러 간 길이었습니다.
네, 남자 둘이서 꽃나들이를 갔다온 거죠. 나이가 들면서 이상할 정도로 점점 더 꽃이나 나무,
새나 아이들이 좋아져요. 그리하여 다른 용건 없이, 정읍 천변에 벚꽃이 가득해 이 세상에
그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다는 풍문에 혹해 새벽에 용산역에서 무궁화로를 집어탔습니다.
형님의 후배가 차를 가져와 정읍의 바깥까지 구경을 시켜 준 덕분에 돌아오는 길이 조금
늦어져 형님의 본가에서 하루를 묵었어요. 하루종일 차를 태워주고, 목을 축여주고, 좋은 곳을
데려가주며 꼼꼼하게 설명해 준 그 후배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그런 후배가,
친구가, 선배가, 동료가 되었으면 해요. 계산에 빠르지 않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들을 해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살피고 바꿔 나가겠습니다.
제 낡은 DSLR을 가져가 사진을 좀 찍었어요. 이 사진들이 코니카미놀타 Dynax 5D로 찍은
마지막 사진들이에요.
6백만화소의, 계조가 무너지고 화이트홀이 자주 생기며, 번번히 렌즈를 인식하지 못하는
제 첫 번 째 DSLR, 너도 수고 많았어. 이제 기록용이 아니라 생활용으로, 아이 사진을 찍으며
좀 더 여유로와 지렴.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정읍 사진들과 일부의 고창읍성 사진입니다.
- 평일 새벽 광주행 무궁화호는 좌석에 여유가 있었어요. 편도 18,600원. 예약하지 않아도 되더군요.
- 정읍에 도착하자마자 형님이 데려간 굴 전문 식당. 굴밥 정식과 굴 순두부를 시켰는데... 굴이 아주
실할 뿐더러 그 때문인지 맛이 아주 진했어요. 제가 먹어본 굴 음식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지요.
- 밥을 먹고 나자 본격적으로 나들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봄이 내리는 연초록 길을 함께 걸었어요.
- 봄은 구석구석에 깃들이 온 천지엔 야생화들이 가득하더군요. 노랗고 푸른 빛이 참 예뻤어요.

- 언덕을 내려오니 바로 동네로 통하는 길...차는 지날 수 없고 사람만 오갈 수 있는 오래된
골목들이 아늑했지요.
- 지나다 만난 어느 집 모퉁이에서...왼쪽 창틀 안에 보이는 게 뭔지 아세요? 닭을 집안에서 기르더군요.
우리를 보고 꼬꼬 거리는 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 같이 간 형님도 놀랍다며 한참을 들여다 보셨어요. 안에는 닭이 여러 마리 있었던 듯 해요.

- 다른 골목에서 만난 한 교회.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는데 계단길이 까마득하더군요.
여름날 저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올라 교회에 다다를라 치면, 자연히 "주여!"가 나오겠지요. 후후.
- 정읍의 천변이 시작되는 곳. 다리 양 옆으로는 모두 벚꽃의 열병식(閱兵式)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 그날 벚꽃길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꽤 붐볐어요. 소풍 왔던 유치원 아이들이 귀여워서 한 컷.
- 이렇게, 2차선 도로를 끼고 양 옆이 가없는 벚꽃길... 한 시간을 넘게 걸어도 끝나지 않는 벚나무들의 장엄.
- 어쩌면 벚의 분홍은 저토록 화사하면서도 동시에 우아할까요. 저는 고개를 들고 하염없이 꽃들을
바라보았어요.
- 지나가다 가게이름이 재미있어 찍어둔 사진. 전라도에서는 '거시기'가 다양한 의미로 쓰이죠.
- 일나온 트럭이 햇빛을 피하도록 잠시 꽃그늘을 덮어준 한 나무. 참 보드라운 광경.
- 벚꽃의 군무는 계속 이어졌지요. 정말 사진을 많이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름다움은 그걸 지켜본
이들에게 의무를 갖게 하지요. 아주 따사로운 의무를.
- 어떤 한 순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평생을 두고 감사하게 되는 일이 있지요. 그래요. 이건 하나의 축복.
- 그날 벚꽃길에는 유혹이 많았어요. 장터가 서질 않나, 대낮부터 파전과 막걸리, 동동주를 헐값에
유혹하질 않나... 참느라고 힘들었어요. 주(酒)여,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주시기를.
- 오후가 되자 구름이 걷히면서 날씨가 개더군요. 환한 가운데 벚나무들의 자태는 더욱 찬란해졌지요.
- 꼭 똑바로 서지 않아도, 같은 모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 우리는 원래 각기 다 아름다운 존재이므로.
- 이 동네길의 공식 명칭 자체가 '벚꽃로' 더군요. 다른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겠지요. 어차피
벚꽃길로 불릴 터이니.
- 벚꽃 나들이를 끝내고 정읍의 구(舊) 시장으로 들어왔어요. 고속/시외버스 터미날에 자리한 시장이
신(新) 시장, 벚꽃길 천변 옆의 오래된 장터가 구(舊) 시장.

- 다행히 구(舊) 시장도 활기를 잃지 않고 살아있더군요. 여기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다 정읍 토박이들이시라고.
- 형님의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한 컷. 이날은 먼 데서 조카 결혼식이 있어 가게를 닫으셨어요.
호떡 3개 천원. 2천원 어치를 사면 7개를 주신다고. 깜짝 놀랄만한 가격. 맛도 정읍 으뜸이라지요.
- 형님이 정읍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셨지요. 서울엔 거의 멸종해 버린 음반가게가 정읍에선
역사를 지키고 있더군요. LP, CD, 카세트 테이프 다 있어요.

- 잠깐 다리를 쉬러 들른 정읍 시기동 성당. 작지만 편안해 보이는 천주교회였지요.

- 정읍의 유명한 헌책방, 서울서점에서. 형님은 이곳 단골이면서, 주인네 이웃이기도 했더군요.
- 후배가 트럭을 몰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아주 순한 사람이었어요. 이후부터는 그가 안내를 맡았습니다.

- 그가 데려간 곳은 정읍의 큰 산인 방장산. 봄 기운 물씬한 계곡을 알려주더군요. 품이 넓고
조용해서 꼭 빨려들 것만 같았어요.
- 산에는 키 큰 나이든 소나무들이 가득. 그 곡선이 유려하더라구요.

- 그 계곡은 놀랍게도 개인 소유라고. 농사짓는 노인 부부의 것이라는데... 특별한 취미가 많으신 듯
신기한 모양의 트럭을 갖고 계시더라구요. 아마 아주 오래된 미제 트럭이 아닌가 싶던데.
- 차는 한참을 달려 고창으로 향합니다. 트럭이 멈춘 곳은 고창읍성. 저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어요.
- 외적(外敵) 방비를 위해 쌓은 곳이라는데...그 규모가 엄청났어요. 성벽을 따라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운치를 더하더라구요.
- 돌을 쌓은 축성미(蓄城美)나 성의 외곡선 모두 하나하나 음미할 맛이 나더군요. 해질 무렵 늦게 도착한
일이 한스러울 따름.

- 이런 고적한 맛은 옛 건축의 특징인 듯 해요.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든 것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튕겨 밀어내지 않는 멋.

- 성 밖뿐 아니라 성안에도 이렇게 길이 포근하답니다. 고창읍성 나들이만 2~3시간 정도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간에 쫓기면서 다니기는 너무 아까운 곳.

- 성 안의 언덕배기들에도 오래된 소나무가 가득...아름이 굵어 제 한 몸으로는 다 껴안을 수 없는 부피.

- 옛 흙길을 시멘트로 덧발라놓았을 뿐인데도 걷는 일이 한 옥타브 더 즐거운 것은 왜일까요.
- 시간이 모자람을 거듭거듭 아쉬워하면서도 들어왔던 성문깨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 성문을 나서기 전에 가까이 당겨서 한 컷. 외벽의 곡선과 건물의 직선이 정말 잘 어울리지요?
- 트럭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쉬워서 한 컷...멀지 않은 때 다시 올 거에요. 잊지 않으리, 고창읍성.
비가 몰아쳐서 사라진 바다를 내다 보고 있자니 어떤 생각이 상기되려 한다.
세상의 어딘가에는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놓여있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는 다리가. 누구? 그 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누구? 바람이 많이 불어, 혹은 비가 많이 내려 통행이 금지되는 바다 위에
놓인 다리. 아무도 지나지 않는 데 홀로 비바림 속에 놓여 있을 바다 위의 다리,
왜 그 다리 생각이 나는지. 당신은 바람이 많이 불어 통행이 금지된 바다 위 다리
건너에 있다. 언젠가 나는 당신이 거기 있다면 어찌하여도 그 다리를 건너야 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 것 같다.
-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 중에서
* 이 모든 사진은 마지막으로 코니카미놀타 Dynax5D, 무보정 리사이즈, 언제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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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별말씀을...이 낡고 오래된 카메라가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긴 해도 하늘빛 하나만큼은 최고로 뽑아내주던 기계였지요. 새 카메라가 과연 화소말고 이것보다 나은 점이 있을지...좀 걱정이 되기도 해요.
여행 다녀 오셨군요...
마지막이라니... 기변을 감행하시는 것인가요?
어떤 선택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
네, 잘 다녀왔어요. 눈이 행복한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함께 한 형님과 동행한 후배님 덕분에 마음이 푸근한 나들이가 되었지요.
이 카메라는 애를 난 친구 주기로 했고, 저는 소니 크롭바디로 기변해요. FF로 가고 싶긴 한데...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무게도 그렇고...당분간은 좀 더 크롭을 써야할것 같아요. 미놀타 렌즈들이 꽤 있으니...그걸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니로 바꾸려구요. ^^
시나몬님 사진들 잘 보고 있습니다. 캐논으로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간신히 참았어요.
酒님께서 내리신 시련은 달게 받으셨어야..^^;;
어제 간만에 나들이를 다녀왔네요..
백운호수길을 걷고, 무려 노도 저어보구요..
호수주변이라서인지 그 동네가 분지인 까닭에 온도가 더 낮은때문인지..
벚꽃들이 여적 빵끗 피어있어서 쌩유베리감사했던 하루..
더하여 정읍도 댕겨온 듯 싶어지네요..ㄳㄳ~
오, 백운호수...저는 한번도 못 가봤네요. 호수에 배 띄워 물 위의 나들이를 다녀오셨나 봐요. 자취가 눈에 아련합니다. 덕분에 왕자님 공주님들도 신기한 여행이 되었겠어요. ^^
봄, 가을은 참 어디 붙어있기 힘든 계절이죠. 꽃이라도 필라치면 늘 엉덩이가 들썩거리곤 해요. 여름이 더디게 왔다가 후딱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 포스팅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좋은 원고 많은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관광스타전북'에 응모해보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이미 블로그에 올라갔던 글도 응모가능합니다. 이 공모는 전라북도 관광지의 사진과 글을 모아 105분께 시상하고, 수상원고는 책으로 출간합니다. 수상도 하고 전라북도 대표 여행작가도 되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관광스타전북’ 검색하면 찾으실 수 있으니 꼭 참여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봄이 왔으니.. 이제 출발해야겠네요.
이걸 보니 마음이 더 동해요.^^
그나저나 거기시 슈퍼.. ㅋㅋㅋ
ㅎㅎ...이게 얼마만입니까? 목소리는 들었는데, 얼굴은 어떻게 변했는지 참 궁금하군요. 일단 서울에서 얼굴 한번 보고, 봄에는 제가 일하는 지역에서 좀 길게 보시지요.
반갑습니다. 우리 이제 자주 너나들이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