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이 진정세를 보인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회사의 큰 프로젝트 때문에 잠시 신도시 부근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어 나도 지난 2년간 내 집을 세주고 신도시와 교통편이 닿는 서울의 도심 부근에다
세를 얻어 살았다. 회사의 프로젝트도 끝나고, 나도 그동안 다른 삶의 외피를 얻어 값비싼 도심에 살
필요가 더이상 없어졌다. 지난 달 원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주인에게 이사 사실을 통보하며
동네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보니, 아직 서울의 전셋값은 '진정'이라는 말이 무색해 보였다. 내가 서울의
끝자락에서 도심으로 나와 사는 겨우 2년 동안, 내 집의 전세 시세는 25% 정도 올랐고, 내가 세를 산
도심의 전세 시세는 45% 정도 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옛 집으로 돌아가 사는 것만으로 나는 큰 돈을
비축하며 살 수 있는 셈이 됐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폭등세라 하겠다.
안온하게 말하자면, 7년 전에 무거운 은행빚을 짊어지고 집을 산 일이 잘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때의 안온함은 사실은 철없음이고, 이웃을 살필 줄 모르는 아둔함이며, 그이상
제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야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벌이가 고만고만한 데 머물러
있는 동안, 부동산 가격만 뾰족한 각도로 튀어오르면서 집없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점점 더 강퍅한
데로 몰아넣어 왔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이 땅에서 세를 얻어 산다는 것은 참 지독한 일이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2년간의 자기 월급을 모두 저축했어도 전셋값이 올라간 만큼을 충당하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지키는 일은 집 없는 이들에게 참담한 수모를 요구했다.
김종철 선생과 김규항 선생의 글을 종종 읽는다. 생활을 닮고 싶고(김종철), 지조를 닮고 싶은(김규항)
그들의 글은 결국 내 삶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담론이 비슷하나 각론이 다른 이 둘이
우리 삶에 요구하는 것은 같다. '자발적 가난'이다. 그들의 판단은 지금의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신이
풍요롭게 살면서도 영성을 간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미친다.
나 역시, 그저 자본의 마름으로 생활하면서 그때그때 비판적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더불어 행복해지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저 둘에게, 맹렬히 동의한다.
지난 몇 년 간, 읽고 공부하고 생각한 것들은 저 둘이 말한 것들의 자장(磁場) 속에 있었다. 기부금을 내고
식단을 유기농으로 바꾸고, 쓰레기 자체를 줄이며, 벌이를 나누고, '착한' 여행을 다니고, 색다른 착상의
책을 낸 것도 그들이 권하고 내가 받아안은 것 너머의 일종의 '자가발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쯤 더 가벼워지고 단촐해졌으며, 그만큼 더 행복해졌다. 적어도 나는 이제 누군가의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망설임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즈음에 와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건 엄청난 변화다. 나는 삼십년 간, 늘 괴로워하며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비관'은 한번도 변주된 적 없는
내 삶의 주조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렇게 삶을 바꿔가는 동안에도 한쪽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가난이 두려웠던 것이다.
줄어든 소비의 대부분을 저축으로 돌렸으며, 끊임없이 경제 동향을 살폈다. 내가 궁극적으로 손해입지 않도록
여러가지 지표에 늘 촉각을 곤두세웠다. 삶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할 꿈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 과정에서
남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자발적 가난'하고는
여전히 거리가 먼 셈이다. 김종철, 김규항 선생은 내 머리 속의 스승이지 내 마음 속의 스승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비교적 어려운 점 없이 살아왔다. 부모님은 그저 시장 어귀에서 가게를 하는 평범한
서민이었지만 그분들은 자식에게 뭐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먹이고 사주며 입히고는 자신을 희생해 왔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오히려 우리 집이 잘 산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어쩌다 내가 특목고에 입학하면서
'진짜' 중산층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때껏 조그만한 동네, 고만고만한 가겟집 형편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왔다. 더구나 사춘기 시절, 무엇때문이었는지는 지금까지 여쭤보지 않았으나 집이
한순간에 기울었던 때를 겪으면서 나는 내 자신과 부모님과 집과 생활을 오랫동안 부끄러워 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똑똑히 기억한다. 문도 없던 집에서 살았던 한 때, 담도 없이 벽 바깥이 바로
길이었던 그 때를. 말 못할 여러 일들이 겹쳐 내 삶은, 또한 부모님의 삶 역시 참 암담했었다. 사정은
그 후 좀 나아졌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생활습관 일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치를 범죄시하는
내 생각은 신념에서가 아니라 그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삶을 위해, 그리고 먼저 행동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이 땅과 세계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사실 명확해 보인다.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만이 내 생각과 마음과 삶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눈독 들이곤 하는 괜찮은 포도주도 포기해야 할 것이고
좋은 카메라에 대한 욕심이나, 잘 없앴다고 스스로 칭찬했던 자동차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할 것이다.
초대형 상점을 구경다니는 일에 대한 취향도, 술값을 호기롭게 지불하는 '기분파'의 버릇도 없애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바늘 구멍 앞의 낙타인 것. 비우고 덜고 맑혀야 할 시간이 한참 더 내 앞에 남아있다.
요즘 내가 집과 도서관에서 열심히 빠져들고 있는 저자는 산문가로서의 김용택이다. 시집이 아닌
그의 책들을 거의 빠짐없이 읽는다. 군더더기 없는 生. 어떻게 하면 나는 내 방식대로,
그가 풍기는 즐거움을 체득할 수 있을까.풍요롭지 않으면서 유쾌하게 검소할 수 있을까.
자연에 속하면서 도시를 부러워하지 않게 될까. 남의 삶을 질투하지 않게 될까.
가난이 언제쯤 간난(艱難), 그러니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게 될까.
한 발 한 발 계속 가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확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지금의 내 가장 큰 '간난'은, 그러니까 가난이 아닌 '간난'은 손으로 풍요를 놓지 않으면서도
머리로 가난해지려고 하는 데서 절뚝인다. 이번에 건너 온 삶으로 계속 가기 위해 서울을 읽고 쓰고
공부하고 걷고 살펴보는 1년 동안 나는 내 이율배반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헤쳐 볼 것이다.
그때쯤, 내 간난이 바닥을 보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살자. 삶이 그 안에서 다시 제 길을 낼 것이니.